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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광화문의 프란치스코가 남기고 간 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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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광화문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시대의 정신적 록스타다웠다.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100만 명 가까운 이 나라 백성이 한마음으로 “비바 파파(만세 교황님)”를 외쳤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차오르는 희귀한 순간이 8월의 광장을 감동의 성지로 만들었다. 돌아보니 교황이 이 나라에 머문 4박5일이 다 그러했다. 무슨 특별한 말씀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얘기인데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던 게 당연하다. 눈길을 사로잡는 기발한 몸짓도 없었다. 누구나 일상에서 하는 행동이요, 인사였다. 그럼에도 교황이 입을 열면 복음이 됐다. 교황의 손짓 한 번에 눈물이 흘렀다. ‘프란치스코 효과’로 설명하기엔 우리 내부의 뭔가가 크게 잘못된 게 아닌지 돌아볼 수밖에 없다.

 교황은 한국을 떠나면서 남과 북의 형제애를 강조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요청했다. 방한 마지막 날 명동성당에서 이웃 종교 지도자들과 만나서는 서로 인정하고 형제처럼 함께 걸어가자고 청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은 이미 1980년대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날이 밝아 여러분이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형제로 보이면 비로소 새날이 온 것이다.”

 교황은 또 아시아청년대회 폐막 미사에서 절규하며 도움을 간청하는 이들을 밀쳐내지 말라고 주문했다. 청와대 영빈관 연설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계속 강화되기를 희망했다. 고(故) 지학순 주교는 70년대에 옥중 메시지에서 “화해는 진실과의 화해이어야 하고 전제를 일삼아 온 강자가 억압에 찌든 약자에게 먼저 청해 와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이 주교단회의에서 지목한 기억의 지킴이와 희망의 지킴이를 우리는 이미 곁에 두고 있었으나 깨닫지 못한 사이에 남의 눈과 입을 빌려야만 저를 돌아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갑오년 올 한 해,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중 하나는 진정성이다. 대체로 진정성(眞正性)으로 쓰이는 이 말을 진정성(眞情性)으로 바꿔 놓고 보면 우리가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지 짚이는 구석을 발견하게 된다. 담론(談論)의 진실함과 실효성은 제쳐 놓는다 치자. 감정의 굴곡조차 일치하지 않는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 앞에서 국민은 처참한 결핍을 가슴에 안고 애간장을 태워 왔던 것이다. 진정성(眞情性)의 정치를 기다리다 지치고 분노한 이 나라 백성이 감정의 놀라운 일치를 온몸으로 펼치는 교황에게 열광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귀한 손님이 떠나고, 이제는 들떠서 기쁘게 차렸던 잔칫상을 거두어야 할 시간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교황이 우리에게 던진 말씀의 더미 속에 있지 않다. 잠시나마 광장에서 이루었던 공동선과의 동감과 화해의 진정성(眞情性)을 기억하며 어떻게 그 아름다운 감정을 퍼뜨릴까 궁리하는 일이 남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형제로 보일 때까지 ‘프란치스코 효과’가 오래 지속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