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0)|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 <제자=필자>(17)|서판수씨의 작품전|김소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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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편지며 국제 전화가 몇 차례 오가고, 성서를 주제로 한 작품 사진도 30여장을 보내오고 해서 대충 그의 화풍을 알 수 있었다. 1935년에 도불, 「그란쇼미엘」에서 그림을 공부했다는 것과, 행동 미술 협회에 소속하면서 「모르코」 「포르투갈」 「이스라엘」 「그리스」 미국 「멕시코」 등에서 순회전을 가졌다는 화력도 알려왔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다짐하는 가교의 일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일본 민족의 역사의 원류인 한국에서 저의 작품이 전시되기를 희망하여 마지않습니다-.』
서판수씨의 편지에는 이런 귀절도 있었다.
회장 교섭이니, 인쇄물 준비니, 액자 주문이니 해서 부산하게 돌아다닌 끝에 79년10월16일부터 21일까지 출판 문화 회관 전시실에서 그의 작품전이 열리게 되었다.
인쇄물에는 56년 전 대판에서 그의 아버지와 처음 만난 사연을 쓴 「새하얀 명함 한장」 이란 내 수필 한편을 따로 인쇄해서 동봉했다. 몇몇 신문이 그 기사를 문화면에 크게 실었고, 전시 첫날에는 「스노베」 일본 대사도 와서 축의를 표했다.
성서를 주제로 한 유화가 과연 우리 나라에서 「어필」할까-, 그보다도 일본 화가의 그림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그런 일들이 걱정도 됐지만 의외로 좋은 결과로 끝났고, 작품도 거의 대부분이 나갔다. 마지막 날 서판씨와 동행했던 그의 젊은 부인이 『일본서는 이런 경우 주선한 분에게 ××%를 드리게 되어 있는데 선생님께는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하고 「퍼센테이지」를 내게 물었다.
『천만의 말씀… 난 56년 전 서판 선생에게 입은 은의를 이자만이라도 갚는다는 생각에서 도와드렸을 뿐입니다. 내 심정은 「퍼센테이지」로는 계산을 못합니다.』
역시나 경우 밝힐 줄 아는 일본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심정을 그들은 이해 못하리라.
전시 기간 중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실에서 경복궁 앞까지 출근 (?)을 했고, 그 전 20여일도 그 일로 해서 백사 제쳐놓고 돌아다녀야 했다.
위에 이상을 느꼈지만 그런 것에 개의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이 귀국한 두달 후에 암 환자로 입원을 하게된 것이 그 때의 과로 때문이 아닌 가고 말하는 이도 있다.
사실이라면 반세기전의 구채는 꽤나 비싼 이자를 치른 셈이다.
56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다. 대판 저사야 삼촌 집에서 그해 겨울을 지내고, 해가 바뀌자 나는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 외가에서 이모들이 읽는 문예지 『백조』를 처음 보았다. 월탄·노작·도향 같은 이들의 이름자도 이때 처음 알았다. 해방 후 내 손으로 대구 달성 공원에 세운 상화시비의 비면에 새겨진 『나의 침실로』의 한 귀절도 그 옛날 『백조』지에서 처음 읽었던 시구였다.
그해 봄에 서울엘 왔다.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새로웠다. 공초·범부·포석-이런 분들에게 소개장을 써준 이가 외가에 자주 드나들던 오택씨-, 양쪽 귀 밑에서 턱으로 「와그너 수염」을 기른, 3·1운동 때 2년간 옥살이를 한 「신문장이」였다. 오택씨는 부산서 조선일보지국을 경영하면서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던 민세 안재홍씨 와는 사제의 의로 특별히 가까왔던 분이다.
서울에 닿은 첫날, 간동 (지금의 사간동) 어귀 대문이 달린 집 아랫방으로 공초 선생을 처음 찾아간 18세적 그때 일은 언제나 어제일 같이 기억에 생생하다.
대문을 들어서자 바로 오른쪽에 툇마루를 밟고 들어가는 높다란 방이 있고, 대문과는 직각으로 들창문이 있다. 그 창 밑 아궁이 앞에서 본목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의 젊은 여인이 군불을 때고 있었다.
『오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러나 내 말엔 대답이 없고, 그 젊은 여인네는 창문 쪽으로 『니이산, 오갸꾸사마요. (오빠 손님 오셨어요)』한다. 본목 치마저고리에 일본말-. 게다가 그 음성이 구슬을 굴리듯 연하고 부드럽다. -누구일까? 「니이산」이라고 불렀으니 오 선생의 누이동생일까? 그렇다면 왜 일본말을 쓰는 것일까?- 그날 그 방에서 공초 선생과 첫 대면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내 이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내게 공초 선생은 동인 잡지의 교정을 내보여 주었다. 그 잡지 「폐허 이후」에는 권두에 공초 선생의 단정한 상반신 사진이 한 「페이지」로 「아트」지에 찍혀 있고 남궁벽의 동경 「요요끼」를 읊은 시며, 수주 변영로씨의 「개자 몇 알」이란 단상 같은 것이 실려 있었다.
서울에 처음 내렸던 그날은 온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여 있었다. 동경에 처음 내렸던 아침도 눈이었다. 그러나 동경은 여기저기 눈 녹은 데가 있어서 길이 질었다. 서울은 같은 눈인데도 꽁꽁 얼어서 미끄러운 맛이 마치 빙하를 밟고 가는 기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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