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내양」이 여대생이 되고 보니…|이남숙 (세종대 1학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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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영문으로 된 원서를 끼고 발랄한 웃음이 넘치는 「캠퍼스」에서 꿈 많은 젊음을 설계하는 대학 생활』-.
시내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면서 환상으로만 그렸던 대학 생활도 그럭저럭 1년이 지났다. 지금 곰곰 생각하면 새벽 5시에 일어나 자정이 넘어야 일손을 놓는 시내 「버스」 안내양 5년의 생활이 참다운 보람의 날들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겨울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살얼음이 인 찬물로 「버스」를 닦으며 꿈꾸었던 「캠퍼스」 생활은 시내 「버스」 안내양들이 그렸던 만큼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로 마련한 등록금인데도 어쩌다 교수들이 나오질 않아 결강이라도 하는 날이면 방학 첫날의 철부지 국민학교 어린이들처럼 환호성을 올리는 학우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만 영문학 이론보다 유행하는 「패션」에 더 관심이 많고 「미팅」 과 「데이트」에 열을 올리는 여대생들을 볼 때마다 같은 또래 안내양들의 고달픈 일상이 되살아나곤 한다.
지난해 내가 「버스」 안내양으론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간 것에 자극돼 밤잠을 설치며 대학진학 준비에 애쓰는 우리 회사 기숙사 안내양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캠퍼스」생활을 애써 얘기하지 않는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 주어진 환경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탈선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굳은 의지로 일하면서 공부하는 내 친구 안내양들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버스」 안내양이 대학생이 됐다해서 떠들썩했지만 나는 지난해 10월까지도 안내양으로 일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새해부터 하오 4시까지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일하다 하오 4시30분에 등교, 밤 9시40분까지 강의를 들은 후 기숙사에 돌아가 복습을 하고 나면 으례 자정이 넘는다.
이 같은 고달픈 생활을 동정한 회사측이 3개월 전인 11월에 기숙사 도서실과 「버스」에 비치하는 이동 도서의 관리를 맡도록 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요즘은 안내양으로 일할 때보다 고달픔이 덜해진데다 대학생이 됐다는 안일에 빠져 예전보다 게을러지고 나약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할 때가 많다.
생활에 여우가 생겼다고 해서 어려웠을 때를 잊는다든가 어려움을 함께 했던 동료나 이웃을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양동 「캠퍼스」에 철쭉이 피어날 올 봄에 다시 학우들과 만나면 우리 주위에 버려진 채 아무도 들보지 않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을 다짐해 본다.
57년 전북 남원 출생, 76∼80년 영신 여객 시내 「버스」 안내양, 80년3월 세종대 영문과 입학 재학 중, 현재 영신 여객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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