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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9)|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 <제자=필자>(16)|전차 안에서 봉변|김소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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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소년기의 객기만은 아니었다. 내 동족을 무찔러 죽인 일본인이 모두 내게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였다. 일부러 남의 눈에 띄는 그런 한복 차림으로 다니면서 『여기「죠오센진」이 있다. 어느 놈이고 한번 덤벼 보아라!』그런 기분이었다.
시전 차장이 더러운 것이나 만지듯 내 저고리 소매를 두 손가락으로 집개처럼 당긴 순간, 내 젊은 피가 역류했다.
『이 친구야, 들어가라면 가랬지 왜 두 손가락이냐! 내 옷에 똥이라도 묻었단 말이냐?』차장은 예기치 않았던 반격에 주춤하면서, 『후꾸쓰 유우나, 기사마」! (웬 잔소리냐, 망할 자식!)』하고 나를 노려본다.
『「기사마」? 누구를 보고 「기사마」냐? 네 배운 말버릇이 그뿐이냐? 대판 전기국은 차를 탄 손님에게 「기사마」란 욕지거리를 쓰라고 가르치더냐! 이 주리를 틀 녀석아!』
내 유창 (?)한 일본말에 당황했는지 차장은 얼굴이 뻘개지면서 한다는 대꾸가, 『「기사마」가 왜 나빠! 「도오또이사마」 (귀양)라고 쓰는데….』
『오오 이 친구야, 그래서 너는 네애비 네어미를 「기사마」라고 불러서 위해 받드냐? 이 급살을 할 녀석아!』
왁자지껄-, 승객들의 주시를 받으면서 전차는 어느새 「아베노」 (아부야) 종점에 닿았다. 전차는 닿았으나 시비는 끝이 나지 않았다.
『도오시따, 도오시따…하나시오 쓰께로! (뭐야, 뭐야, 결판을 지으라고 !) 』
차장 패들에게 끌려서 차고 옆에 있는 대기실 같은데로 갔다. 20∼30명되는 운전수이며 차장들이 『나마이끼나 야쓰다. 야찌마에! 야찌마에! (건방진 자식 같으니라구, 해치워! 해치워!)』하면서 내 주위를 이리떼처럼 둘러쌌다. 전찻간에서는 기고만장했던 나도 이쯤 되고 보니 속절없는 포로 신세다.
바로 그때였다. 『꼬라! (이놈들아)』하고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중년 신사 하나가 차장들 앞으로 다가섰다. 키는 나지막하나 몸집은 올 차게 생긴 40대의 인물이다.
『이 불한당 같은 놈들아, 그 사람을 어쩌자는 거냐! 손가락 하나 댈 놈은 나오너라! 내가대다!』
살기를 띤 차장패들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이 인물들을 어리둥절 쳐다만 볼뿐이다.
『이 무지한 놈들! 시비의 자초지종을 전차 안에서부터 내가 보아왔다. 그 사람 잘못이 뭐냐? 손가락으로 승객을 끄집어 넣으라고 누가 가르치더냐? 잘못 했으면 잘못 했다고 사과를 할 일이지, 그래 이 한심한 친구들아, 수천리 타국타향에 온 사람을 작당해서 주먹을 휘둘러야 한단 말이냐!』
중년신사는 목 메인 비창한 어조로 꾸짖었다. 물론 일본인이다. 그 일본인의 두 눈에 눈물이 어린것을 힐끗 보았을 매 불덩이 같은 감동이 내 가슴을 스쳤다.
주먹을 치켜들고 설치던 차장 패들이 고양이 앞에 쥐 떼처럼 잠잠해졌다. 전찻길까지 나를 데리고 나은 그 중년 신사는 헤어질 때 명함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자기가 죄나 지은 듯이『오늘 일은 부디 잊어 주오. 그리고 일본인이 모두 저 사람들과 같다고는 행여 생각지 마오』하고 대신 사과를 했다.
내 기억 속에 지금도 때묻지 않은 채 간직되어 있는 명함 한 장-. 「일요 세계사 사장 서 판보치」
이것이 거기 찍혀진 이름이다. 「성서대사전」의 발행자 서판보치씨는 그 뒤 30년이 지난 1953년, 나와 다시 한번 일본 땅에서 재회를 했고, 교포 자제들을 위해서 한 때 내가 간행했던 「목근문고」, 「수근소년문고」에도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70이 넘은 백발 노인인데도 정정한 그 기백은 처음 만났던 그 시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뒤 몇해 안 가서 서판씨는 세상을 떠났다.
20년 전, 교포지 「신세계」 신문에 이 얘기를 쓰면서 마지막 한 대문을 나는 이렇게 맺었다.
『-나는 일본과 일본인을 누구 못지 않게 안다는 사람의 하나이다. 동시에 일본인의 그릇됨과 잘못을 헤아림에 있어서도-. 그러나, 일본엔들 어찌 의인이 없으리오! 나는 20세 전 소년기에 내 가슴에 감동의 불씨를 심어준 서판씨의 두 눈에 괴었던 그 눈물로 해서, 설혹 능욕과 비분에 이룰 갈지언정 일본을 원수로만은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다.』
두해전 (79년) 가을, 일본에서 보내온 편지 한장을 받았다. 발신인은 「서판수」라는 65세의 양화가-, 나와는 일면식이 없었지만 세상을 떠난 일요세계사장 서판보치씨의 장남이라고 자기소개를 해왔다.
한국에서 작품전을 갖고 싶으니 알선해 달라는 내용이다. 「유럽」 각지에서 이미 여러 차례 작품전을 가졌다는 경력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력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57년 전 서판씨에게 입은 은의를 갚아야 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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