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8)제 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김소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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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머님과의 이별>
진해로 가기 전, 나는 잠시 어머니를 따라 목포에서 산 일이 있다. 거기서는 얼마나 있었는지-, 손에 쥐었던 커다란 귤을 깊은 우물에 떨어뜨리고는 소리를 내어 운 일이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다.
선친의 죽음으로 해서 하사금이니 동관조위금이니 유아인 내 교육비니, 이런 명목의 돈들이 정부에서 내렸다. 땅 한평 3전하던 시대에 만금이란 돈은 비록 그것이 아들의, 남편의, 목숨의 대상이라고는 하나, 젊은 과수인 어머니로나 하루아침에 가산을 상실한 조부모님으로나, 적지 않은 관심사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내 보호자인 어머니 명의로 그 돈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부산 제일은행이 보관하고 있었다. 내가 성년에 달할 때까지란 조건으로-.
조부모님들은 가산과 자식·손자를 일시에 잃어 버렸다. 하늘같이 믿었던 자식-. 진종일을 걸어도 남의 땅을 밞지 않았다던 전지가 삽시간에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보니 남은 건 단 하나 어린 손자에 대한 애정뿐이다. 어머니에게서 나를 앗아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시다가 마침내는 어머니 물래 나를 훔쳐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법으로나 정리로나 선친의 동료, 부하들은 어머니 편을 드는 이가 많아서 조부모님들은 훔쳐온 나를 눈물로 도로 돌려보내야 하는 그런 회비극이 몇 차례없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시부모와의 승강이에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선친의 3년상이 끝나자 나를 조부모님께로 몰려보내고 「아라사」(제정「러시아」)로 떠났다.
내가 성년이 될 때까지란 기한부로 임치한 돈을 제일은행에서 어떻게 찾았으며 「아라사」까지의 먼 노정에 길 인도를 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런 세세한 경위를 오fot동안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안 것은 70년의 세월이 지난 최근에 와서다).
구 한국시대에는 일본·청국·「아라사」가 서로 세력을 다투며 한반도를 무대로 갖은 음모와 술책이 암약했고, 황제까지도 정쟁의 소용들이 손에서 한때「아라사」공관으로 피신까지 하셨다. 지리적인 거리보다도 감각에 있어서「아라사」는 그다지 먼 나라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간 곳은 그 당시 한반도의 이주민들이 많이 살던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 쪽이 아니요, 「아라사」의 안방이라고 할 문호「톨스토이」의 고장「쯔으라현」의 이웃 고을이었다.「톨스토이」는 그 2, 3년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뒷날 나는 어머니에게서 활자에 없는「톨스토이」의 일화들을 이것저것 많이 듣기도 했다. 「쯔으라현」은「톨스토이」의 고향인 관계로 쉽사리 기억할 수 있었다.
왜 어머니가 그렇게도 먼 곳으로 갔을까? 거기는 어떤 사연이 있었으며, 누가 거기까지 길잡이 노릇을 했을까.
그런 의문이 오랫동안 염두에서 떠나지 않았다. 「모스크바」와「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시베리아」철도가 개통된 직후라지만 동양의 반도국에서 젊은 여인네가 가기로는 너무나도 먼 여로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그 수수께끼가 어머님이 세상을 떠난지 30년도 더 지난 요즘에 와서 우연히도 윤곽이 드러났다. 외가댁 이모님- 어머니의 바로 아랫 동생인 그 이모님에게 『「쓰으라현」이웃 고을의 정확한 이름을 혹시나 기억하고 계시냐?』고 물은 것이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한 꼬투리였다.
젊은 시절 일본으로 유학해서 신호여자 신학교를 나온 이 이모님은 83세의 고령인데도 가끔 내 처소를 찾아 주신다.
평소에 어머님 얘기가 나온 적은 거의 없었지만 때마침 기본의 문예지『신조』와 약속한 자전원고의 자료를 정리하던 참이라 두어 달 건 이모님이 오신 기회에 용기를 내어 물어본 것이다. 표면으로는 친정과도 의절한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어머님이 먼 「아라사」에서 1년에 한번쯤 친정 동생들과 서신 내왕이 있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6, 7세 적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한다면서 집안 어른들 모르게 내게 몇자 글을 적게 한 기억이 있다).
그 회신봉투는 「아라사」에서 오는 편지에 미리 동봉이 되어왔기에 이모님도 정확히는 지명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면서『2, 3년 후에「아라사」의 서울로 옮겨갔다는 얘기였다』 고 덧붙였다.
『「아라사」의 서울이라니요? 거기가 어딘데요?』
『글세, 하도 오래 전이라 잊었지만 하옇든, 「필란드」·「스웨덴」-, 그쪽에 가까운 곳이었어·‥.』
『「레닌그라드」던가요?』
『아니야, 그런 이름은 아니라구·‥.』
「레닌그라드」는 혁명 후에 붙여진 이름이란 생각이 나서 고쳐 물었다.
『「페테르스부르크」가 아니던가요?』
『글쎄, 그런 이름 같기도 하구…,어디 지도 좀 보자구, 지도면 찾아 낼거야…』
나는 일문판 대사전에 붙어있는 소련 연방지도를 이모님 앞에 펴 보였다. 이모님은 서슴없이「레닌그라드」를 가리켰다.
『그게 옛날 이름으로「페테르스부르크」라고 부르던 곳이랍니다』.그리고 나서 사전의 그 한쪽을 뒤졌더니, 어머니가 간 그 당시(1918년까지)는『「아라사」의 수도로「폐데르그라드」로 불리었다』고 나와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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