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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엔 부드럽게 일침, 대북 메시지는 지엽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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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호 08면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해 “분단된 상태로 지속돼 온 69년의 비정상적인 역사를 이젠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뉴스1]

-이번 8·15 경축사를 평가한다면. 100점 만점에 몇 점 주겠는가.
▶조세영=대일(對日) 메시지는 85점을 주고 싶다. 미래를 위한 협력과 과거사 인식이 동시에 중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내년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임을 강조하며 위안부 문제를 푸는 게 시급하다고 했는데, 이는 지난해 광복절 메시지에는 없었던 내용이다. 또 일본 지도층과 국민을 분리해 접근했다. 과거사에 대한 정치지도자의 결단을 촉구하기에 앞서 양국 간 정서적 교류의 전통을 강조했다. 점잖게 할 말은 하면서도 지적해야 할 것은 지적했다고 본다.
▶김용현=대북(對北) 메시지는 65점이다. 간신히 낙제를 면한 수준이다. 거대 담론대신 작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이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 때문인 듯싶다. 고뇌의 흔적이 보이지만 아쉽다.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낮은 톤이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통일부 장관 수준이다. 좀 더 크게 판을 흔드는 관점에서 메시지가 나오길 기대했다.

[전문가 대담] 박 대통령 8·15 경축사 의미와 평가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아쉽나.
▶김용현=지금 남북관계에서 양측은 서로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길들이려 한다. 그러나 갈등을 풀 여건은 조성하지 못했고, 상황을 돌파할 동력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박 대통령으로선 큰 어젠다를 던져봤자 북한이 호응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을 수 있다. 핵문제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창구를 여는 게 걱정스러워 하천이나 문화유산 발굴 같은 낮은 수준의 제안을 내놓은 듯싶다. 하지만 올 초 통일 대박론과 드레스덴 선언을 터뜨리고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도 출범시키는 등 큼직한 행보를 하다가 갑자기 동선을 축소한 건 의아하다.

-대일 메시지는 다소 부드러워졌다는 평가가 많은데.
▶조세영=최근 한·일 관계는 최악이다. 1년 반 넘게 정상회담을 못한 비정상 상태가 장기화할 조짐이다. 상호 비난 강도가 높아질 우려가 높고 일본 내 혐한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이런 와중에 양국 지도자가 강한 언어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시작하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은 지난 3·1 절 기념사에서 “(일본이) 역사를 부정할수록 초라해지고 궁지에 몰린다” “정치적 이해만 따지면 고립을 자초한다” 등의 강한 언어를 구사한 바 있다. 이번엔 지적할 대목을 정확하게 짚으면서도 말의 톤을 낮춘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일본보다 북한 관련 언급이 많았다.
▶김용현=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 관련 언급은 20%였다. 올해엔 25%가 넘는다. 그만큼 대통령이 북한에 하고픈 이야기가 많다는 거다. 큰 어젠다를 제안하긴 어려우니 대화 범위를 넓혀 작은 이야기를 많이 하자는 뜻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북핵에 대해선 단호한 입장을 재확인했다. 즉 평화와 안보를 병렬적으로 언급하다 보니 양이 늘어난 것이다.
▶조세영=한·일 관계는 이제 양자나 평면이 아니라 입체로 봐야 한다. 지난 5월 29일 북한과 일본이 관계 정상화와 관련해 1차 합의를 이뤘는데, 한국과는 사전 협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국내 일각에선 아베 신조 총리가 뒤통수친 것이라 주장하지만, 모든 문제를 한·일 관계로만 국한해선 상상력이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 일본이 왜 북한에 접근하며 한·미·일 공조를 흔드는지, 북한을 활용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는 아닌지 등을 종합적으로 따지며 대처해야 실마리를 풀 수 있다.
▶김용현=지난해 8·15 경축사만 해도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비무장지대(DMZ) 세계평화공원 조성 같은 구체적인 제안이 있지 않았나. 그런 점을 감안하면 올해는 5·24 조치에 대해 해제까지 언급하긴 어려워도 우회적인 수준에서 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어야 했다.

-일본·북한의 반응을 예상한다면.
▶조세영=일본은 긍정적 측면만 보려 할 거다. 광복절 당일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찾지는 않았지만 공물을 보냈다. 또 정부 각료 3명과 의원 80여 명이 참배해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과거 일본 민주당 집권 시절엔 ‘정부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불가’ 같은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그때도 독도 문제로 양국관계가 냉각됐긴했지만 최소한 역사인식은 아베 정부에 비해 전향적이었다. 그러니 우리도 일본에 희망을 접거나 스스로 목표나 기대수준을 낮춰선 안 된다. 아베 정부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다음 정부까지 바라보면서 일본에 집요하게 태도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김용현=북한도 답답할 것 같다. 생물 다양성이나 하천 관리 제안은 우리 입장에서만 생각한 거다. 북한으로선 당장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게 급하지 않겠는가. 호응할 게 별로 없을 듯 하다. 게다가 김정은은 현재 남북관계를 주도할 처지가 못된다. 자신의 체제 다지기가 우선이다. 그런 만큼 북한은 박 대통령 경축사에 부정적·소극적으로 대응하며 금강산 관광 재개나 5·24 조치 해제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건 북한의 요즘 흐름을 보면 박 대통령에 대해 실명 비난을 자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천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고 응원단도 보내기로 하면서다. 북한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기대치가 있다는 방증이다.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때맞춰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박 대통령의 8·15 메시지에도 영향을 미쳤을까.
▶조세영=교황 방한에 맞춰 대일 메시지가 부드러워졌다고는 보지 않는다. 누차 얘기했듯 현재 한·일 관계는 ‘비정상의 장기화’다.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라는, 개성 강한 두 지도자만 최전선에서 맞붙어 싸우는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아껴야 한다. 외교에선 최고 지도자가 모든 메시지를 쏟아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동북아 원자력안전협의체 제안은 어떻게 보나.
▶조세영=고무적인 제안이다. 한·일 관계의 핵심은 ‘분리 대응’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강경하게 대응할 분야와 실용적으로 교류할 분야를 나눠 대화해야 한다는 거다. 위안부·독도·야스쿠니 참배 등은 타협할 사안이 아니다. 반면 안보나 경제는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주한 미군과 주일 미군은 결코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일본과의 안보 협력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또 이미 일본이 겪고 있는 고령화·저성장 기조도 우리가 깊이 참조해야 할 대목이다. 이처럼 타협할 것과 강경 대응할 것을 분리하지 않고 뒤섞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반면 분리한다면 과거사 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김용현=동의한다. 북핵 위험이 여전한 상태에서 박 대통령의 동북아 원자력안전협의체 제안은 의미 있다. 한국·중국·일본의 협력을 자연스레 연결시킬 묘수일 수 있다. 우려되는 건 구체적인 실천 여부다. 박근혜 정부는 통일대박론이나 드레스덴 선언 같은 큰 것을 던져놓고 후속조치가 없는 게 문제였다. 이젠 정부도 대북 문제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질 때다.

-한·일 정상회담은 성사될까.
▶조세영=신중해야 한다. 괜히 어설프게 만나 두 정상이 얼굴을 붉히는 사태가 벌어지면 상황만 악화되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외교 채널들을 활성화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반이 됐는데 한·일 외교장관회담은 세 차례밖에 이뤄지지 않았다. 과거엔 양국 장관이 1년 동안 7~8 차례 이상 만났다. 정상간에 회담을 못하는 대신 실무진은 실컷 싸우더라도 활발히 만나야 한다.

-대북 관계는 어떻게 흘러갈까
▶김용현=정부가 19일 열자고 제안한 제2차 남북 고위급 접촉에 대해 북한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우선 지켜봐야 한다. 김정은도 무조건 대화를 외면하긴 어렵다. 따라서 정부는 교황 방한에 이어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이를 놓치면 앞으로는 타이밍 잡기가 만만치 않다. 5·24 조치는 전임 정부의 조치이니 유연하게 접근할 여지가 있다. 금강산 관광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에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의 관리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시점이다. 더 유연하고 적극적이며 선제적으로 나설 때다.

진행=최민우 기자, 정리=박종화 인턴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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