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물 탁해도 아랫물은 맑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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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느 자리에서의 일이었다.
대학을 나온 아들이「퓨즈」도 하나 이을 줄 모른다면서,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모르겠다고 어느 한 분이 한심스러워했다.
내 옆에 앉았던 다른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면서,『우리 아들은 잘 고쳐요』하고 나에게만 듣게 말했다. 나도 빙그레 웃음을 띠며 답했다.
두 사람은 다 내가 좋아하는 분에 속하는데, 그 느낌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문외한의 비유인지는 모르지만, 정주와 소주라고나 할까. 앞의 분은 우리사회에서 보통 일컬어지는 신사에다 고급 문화같은 것이 연상되고 또 한 분은「휴머니즘」과 서민이 악수한 것 같은 인품이었다.
그런데 그 신사에다 고급 문화같은 것 속에서「퓨즈」도 만지지 못하는 아이나 학생이 더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 고 나는 생각할 애가 있다.
그야, 아이들의 특성에 따라서 그런 것을 잘 만지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다. 그러나 대체로 가정집의 두꺼비집 정도는 구태여 대학교육까지 받지 않더라도, 조그만 상식이 있고 해볼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못하는 것은 해보지 않아서, 그냥 위험하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아들이 두꺼비집을 만질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학교 교육에 그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모 어쩌면 그 이전의 우리 사회에서의 신사나 고급 문화를 좋아하는 그 사고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이 자연시간에 물은 섭씨 1백도에서 끓는다는 실험을 한다고,「프라스코」에서 끓기 시작하는 물에 온도계를 꾹 찔렀다.『팍!』 온도계는 박살이 났고, 그 여세로「프라스코」도 박살이 나고, 선생님은 어린 학생들 앞에서 얼굴이 시뻘개졌다. 아주 침착한 선생님이었는데도「알콜」불을 끄는 선생님의 손끝은 떨리는 것 같았다. 위험했다는 생각도 있었겠고, 그보다 더 어린 학생들 앞에서 창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찬 것이 더운 것 속에 갑자기 들어가면 그렇게 박살이 난다는 것을, 우리는 몇 번의 시험에서보다도 그 한번의 실패한 실험에서 평생을 가도 잊지 않게 실제로 보았다. 그와 함께 그 선생님도 잊지 못한다.
「위험」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책임감」으로 바꿔서 생각해보곤 싶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거창한 책임은 나도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고. 모 어떻게 켜야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기껏 지고 싶다는 책임은 자기 일에 충실하고 싶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이의 손목을 잡고 은행으로 세금을 내러갈 때,『국민은 나라에 세금을 내야한단다』하고 가르치고 그대로 실행만 하면 된다. 세무원은 공정을 지키는 책임을 고수할 것이고, 그것을 고수 못할 때 남의 탓으로는 돌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옷 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소리는 이제 그만두자』고 했단다.
윗물이 맑지 않아도 아랫물은 맑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자기 일에 책임을 지자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책임이 그리 무기력하고 이기적이고 안일하지만은 않은 것이어서, 사람은 책임을 회피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길로 남을 들먹이는 습성을 갖는다.
그래서는 언제까지 가도 이뤄지는 것이 없지 않을까.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는데? 내가 해야만 우리가 한탄하는 민도도 높아질 수 있는 것인데. 충실히충실히, 오늘을 충실히, 금년을 충실히 올해는 그렇게 살고 싶다. 박순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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