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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표 음모탐지 모 구출해 줘|30대 광홍문 벼락 출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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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홍콩=이수근 특파원】세인의 관심을 모으면서 북경에서 진행되고 있는 강청과 임표 집단에 대한 정치재판은 지난 15년 동안 두꺼운 죽의 장막 속에 가려 있던 수많은 비밀들을 폭로하고 있다.
방직공장 직공출신의 무명의 30대 청년 왕홍문이 73년에 중공 ▲서열 제3위의 인물(당부주석)로 혜성처럼 발탁된 배경도 이 재판에서 비로소 밝혀진 중공의 수많은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다.
왕홍문이 임표 일당의 모택동 제거음모계획을 제일 먼저 탐지하고 모의 목숨을 위기일발의 순간에서 구출한 공로가 왕의「로키트」식 출세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당시 국방부장 겸 당부주석으로 헌법에 모의 공인후계자로 명문화돼 있던 임표는 70년 유소기의 숙청으로 공석이 된 국가주석 직을 차지하지 못한데 대해 앙심을 품고 모를 살해하고 군사정변을 일으켜 중공을 장악하려는 소위「571공작」을 음모하고 있었다.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으로 출발해서 세상의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정권을 탈취한 모는 임
표의 의중을 어렴풋이 나마 짐작하고 있은 듯 하다는 것이 이 재판에서 밝혀지고 있다.
풍부한 지략과 노 회한 전술전략을 구사한 모는 어찌 보면 임표를 제거하기 위해 먼저 손을 쓴 것 같기도 하다.
모는 71년 8월 중순에 양자강남북을 순시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역일대의 임표 세력을 점검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는 이 여행도중 무한에 들러 무한부대 제1정치위원 유풍시를 단독으로 접견한 자리에서 무한군구 사령 증사옥이 임 표 직계인물이어서 믿을 수가 없으며 총 참모장 황영승은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말하고, 한술 더 떠 임표의 이름까지 들먹이고는(공식문서에는 이 부분삭제)유풍시에게 부대의 동향을 면밀히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유는 번민 끝에 부하인 장옥화와 상의했으며 장은 다시 호북성 당 상임위원 하방은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문혁의 조반 파 출신으로 왕홍문과는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하는 이를 왕에게 알렸으며 왕으로부터 계속 사태의 발전을 주시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는 그후 장으로부터 유가 공군 총 사령 오법헌에게도 모와의 대화내용을 보고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그 즉시 왕에게 보고했다.
당시만 해도 상해시의 제3서기에 지나지 않았던 왕은 모의 순시가 상해에 이르렀을 때 모에게 즉시 상해를 떠나도록 권유했고 모가 그 권유를 받아 바로 상해를 탈출함으로써 위기 일발의 순간을 넘길 수 있었다.
모가 왕의 보고를 듣고는 임표가 유의 밀고를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북경으로 돌아간 것을 보면 과연 수많은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일세의 음모 가의 모습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유는 모가 생각한대로 자신이 전에 신세진 오법헌에게 보고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돼 임표는 급히 모 제거를 위한 「571공작」을 서두르게 됐으며 결과적으로 임표는 모가 파 놓은 함정에서 손오공처럼 행동한 셈이 됐다.
모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왕을 중앙에 불러 30대 초반의 무명청년으로 하여금 당 중앙의 일상공작을 주재토록 했으며 73년 당 십전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불과했던 왕을 당 제3인자로 끌어올렸다.
모는 또 74년에 발표한 당 중앙 문건(대외 비)에서 왕이『농촌출신으로 군(왕은 소위 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설이 있음)에 투신하여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믿을 만 하다면서 후계자로 정했다고 말했다.
모는 왕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모는 왕이 강점과 자주 회동하는 것을 보고 왕을 불러 강청과 어울려「사당」을 만들지 말도록 충고까지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런 왕도 결국 법정에 서서 비굴한 모습을 추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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