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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1) 경기 80년-제71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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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간혹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마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가운데서 「경기」라는 부분을 빼버리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60이 채 못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경기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제일고보와 경기중학에서 학생으로 5년, 해방 후 모교에서 평교사로 13년, 그리고 그 사이 잠깐의 공백을 뒀지만 다시 모교의 교장으로 10년 해서 모두 28년, 그리니까 내 인생의 반을 경기와 함께 산 셈이다.
때문에 지금은 모교를 떠나왔지만 30여년 동안의 경기에서의 추억은 언제 돌이켜 생각해봐도 항상 흐뭇함을 안겨주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 종로구 가회동 142번지. 화동 구경기의 교장관사 자리에서 불과 집 몇채 사이의 가까운 거리다.
조부인 서병철씨는 일찍이 관비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개명한 한말의 지사로 윤치호·이상재 등과 교유하고 독립협회운동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청년운동을 벌인 분인데 특히 교육에 관심이 깊어 기호학당(중앙학교의 전신) 설립에 참여, 자신의 집 한 채를 모두 팔아 기부할 정도의 열성을 가진 독지가였다. 내가 태어날 당시 내 부친은 외숙과 함께 중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난지 백일이 못돼 우리 식구들은 부친이 계신 북경으로 이사, 그곳에서 살다가 꼭 3년만에 할머니·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식구만이 귀국, 가회동 옛 집에서 살았다.
30년 내 나이 8살이 되면서 수송학교에 입학했는데 어린 마음에도 나만 믿고 고생하시는 할머니·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공부, 6년 동안 줄곧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 때(36넌) 나는 최우등상인 경기도지사 상을 받았고, 이어서 명문 제일고보에 응시, 합격하는 영예를 안았다.
우리 수송학교에서는 제일고보에 모두 8명의 합격자를 냈는데, 그때 같이 합격한 친구중의 하나로 최형규군(대한전선사장)이었다.
당시 제일고보의 입학정원은 2백명. 내가 지원한 해엔 약 8백50명이 지원했는데, 전국 유수의 보통학교에서 각 도지사 상을 탄 실력파만도 3백30명으로 이들만으로도 입학정원이 훨씬 넘는 심한 경쟁을 보였다.
그때 비교적 많은 합격자를 낸 학교는 서울에서 교동·재동·사범부속·수송 등이었고, 지방에서는 개성의 만월, 광주의 서석 등이었다.
36년 4월 대망의 입학식이 있었는데 당시는 아직 신 교사가 세워지기 전으로 남관 뒤편 좁은 운동장에서 입학식이 있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반 배정이 있었는데 나는 1학년1반으로 배속됐고 영예롭게도(?)부반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됐다. 당시 우리반에는 최세경(전 KBS사장), 방일영(조선일보회장), 권이혁(서울대총장), 심언봉(예비역육군소장)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특히 심언봉과는 교내 「테니스」대회의 복식「파트너」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입학 후 시간이 흘러가면서 제일고보다운 훌륭한 선생님, 선배, 동료들을 많이 만나게 됐는데 특히 내가 1학년 일때 최상급반 이었던 5학년 선배들은 특히 훌륭한 사람들이 많아 문자 그대로 제제다사였다.
후에 제일고보 33회 졸업생이 된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최규하(전대통령), 이영섭(대법원장), 민관식(남북조절위장직무대리), 성좌경(전 과기처장관) 김효규(「세브린스」병원장), 최세황(한성통운대표) 등으로,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화려한 면면들이었다.
특히 최규하 선배는 「공부 잘 하는 학생」으로 후배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37년 3월의 졸업식 때 최선배는 당시 조선인으로선 좀체 입학이 어려웠던 일본의 명문 동고국사 영문과에 이미 합격돼 있던 데다, 졸업식에서도 최우등상을 받음으로써 후배들로부터 더욱 존경을 받았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경기에 다닐 때인 36년부터 41년까지는 일제가 중일전쟁(37년)을 일으키면서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서의 발판을 다지던 때로,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서서히 그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기 시작, 우리 민족전체는 일제의 발악적인 탄압으로 신음하던 때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일고보도 큰 시련을 겪었는데, 학교이름을 경기공립중학교로 바꿔 일인학교와 같은 편제로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황국신민·내선일체·일나동인의 미명하에 일제는 민족말살을 위한 교육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하던, 더욱더 큰 수난을 예고하던 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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