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영화천국] "첫 베드신 기대해 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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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당첨된 영화 시사회에 다녀왔다. 기자 시사회에는 배우나 감독이 참석하는 것 같던데 그들은 와서 영화만 보고 가나.

A: 그럴 리가 있겠나. 배우.감독이 시사회에 오는 목적은 오직 하나, 무대 인사다. "우리 영화 잘 봐주이소~"하고 눈도장을 찍으러 오는 것이다. 그러면 무대에 올라와 무슨 말을 할까. 이것도 유형이 있더라.

첫째, 당연지사형.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십시오."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한다. 지당한 말이다. 누가 자기 영화 소개하면서 "건성으로 쉬엄쉬엄 만들었으니 볼려면 보고 아님 마슈"나 "후지게 나왔으나 너그럽게 봐 주세요"라고 하겠나.

당연지사형 인사는 너무 당연해서 당연히 재미없다. 어쩜 감독이나 배우나 저렇게 국화빵 찍어내듯 똑같은 말들만 하나, 이 사람들이 이거 미리 짜고 나온 거 아닌가, 한심+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이 개성 없는 인삿말을 거꾸로 뒤집는 머리 좋은 사람도 있으니 박찬욱 감독이다.

그는 지난해 '복수는 나의 것'시사회에서 "재미있게 만들었으니 열심히 봐주세요"라는 주객전도 발언으로 방심하고 있던 기자들의 허를 찔렀다.

둘째, 황당형. 영화와 아무 상관 없는 멘트를 날리는 경우다. 지난 2월 열린 '쇼쇼쇼' 시사회에서 한 배우는 "영화 보고 나갈 때 쓰레기는 꼭 치워주세요"라고 해 좀처럼 놀라지 않는 기자들을 몹시 당황케 했다.

지난 달 '대한민국 헌법 제1조'시사회에서는 "이창동 감독님의 문화관광부 장관 취임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도 나왔다. 시의성도 좋지만 어째 듣기가 거북했다는 게 참석자들의 얘기였다.

황당형은 주연보다는 조연이, 스타보다는 신인이 선호하는 유형이다. 연기보다 인삿말로 튀어보겠다는 심사?!

읍소형도 종종 눈에 띈다. 인류 공통의 박애 정신에 호소하는 것이다. "감독 이하 전 스태프가 불철주야 몸을 아끼지 않고 작업했습니다." 소신공양으로 성불했다는 식의 주장인데, 이것만 해도 약과다. 지금은 미국에 도피 중인 개그맨 출신 모씨가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의 시사회에서 "인간 ○○○ 한번 더 살려주시는 셈 치고 좋은 입소문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매달렸다. 목숨까지 운운하는 인삿말 때문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다고 호소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참신한 인삿말 한 마디가 그 배우의 인상을 바꿔놓는 경우도 왕왕 있다.

"제가 처음으로 베드신을 찍었으니 기대해주십시오"(베드신과 너무나 거리가 멀 것 같은 배우 송강호가 스릴러 '살인의 추억'에서)라든가, "(겸연쩍게 웃으며)저도 이제 한번 흥행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플란더스의 개''고양이를 부탁해''복수는 나의 것' 등 출연작들이 부진했던 배두나가 '굳세어라 금순아'에서)가 좋은 예다. 결론은 하나.

능력 있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창의성을 발휘한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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