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2)제71화 경대 80년(10)경성고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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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제반규정은 물론 조선교육령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교육령에 의하면 고등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은 4년으로 되어있고(제12조).또 그 입학자격은 나이 12세 이상으로서 수업연한 4년의 보통학교 졸업자나 이와 동등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되어 있었다.
경성고보의 학생선발 요령은 관립한성고등학교 시대와 마찬가지로 입학생의 절반을 무시험으로 입학시켰다.
이 무시험의 특전을 받을 수 있는 학생은 보통학교 성적이 우수한 자로서 교장의 추천을 받아야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학생의 사회적 신분도 문제가 되었으니 학교당국은 학생들을 양반·상민으로 구별, 신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교초기인 1900년대에 비해 1910년대 경성고보의 명성은 이미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 당시 고등보통학교는 전국을 통틀어 두 곳(후에 대구·함흥 등지에 설치되었음)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성고보에는 13도의 수재들이 몰려들었다.
1913년 충남 예산보통학교간 1등으로 졸업하고 도지사의 추천으로 경성고보에 무시험 입학한 이태규 (15회·과학원명예교수) 는 『충남의 대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교문을 들어섰는데 운동장에 운집한 서울의 명문 세도가 자제들의 수려한 용모에「콤플렉스」를 느꼈다』고 술회할 정도다.
당시 입학시험을 거쳐 들어온 학생들은 격심한 경쟁을 치렀다. 1911년도 입학자는 전년도 50명에 비해 3배로 늘어난 1백50명이었는데도 그 경쟁률은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4대1이었다.
그때의 입학시험은 합격여부가 당일로 결정되었다. 주로 첫 시간에 국어 (일어)·한문시험이 실시됐는데 첫 시간 시험 결과가 합격선 미달이면 자동적으로 ,다음시간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잃게됐다.
또 첫 시간 과목은 무난히 통과했지만 다음시간 점수가 합격선 미달이어서 낙방하는 등 입학시험장은 회비가 엇갈렸다.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뚫고 입학식장에서 『13도의 수재를 모아 화동 학사의 빚은 길이 빛난다』로 시작되는 노래를 부를 때는 뿌듯한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이었다.
1910년대 초 경기를 거쳐간 면면들로는 김준연(10회·동아일보 편집국장·법무장관·3, 4,5,6대 민의원역임·작고), 민태원(10회·문인·『레·미제라블』등 번역·작고), 장기창(10회·재계에서 활약), 이학왕(11회·신소재개척자 이해조의자제), 지성주 (11회·종두법을 들여온 지석영의 자제), 최현배(11회·동경제 대졸·한글학자·연세대부총장·작고), 심문 (12회·국회의원), 윤치창 (12회·주옹 윤치호의 아우·영국공사역임),맹주천 (18대 경기교장·작고), 김기덕 (경성고등공업 졸·경기출신 중 최초로 광업계 진출·작고), 김대우 (구주제국대학 졸·경기출신 중 최초의 도지사·작고), 윤성정(미국에서 광산학전공·4대 교통부장관·작고)<이상 13회>등이 있다.
또 조선교육령에는 관립 고등보통학교에 사범과 또는 교원속성사를 두어 보통학교 교원이 되려는 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사범과와 교원속성과의 수업연한을 1년 이내로 하고 입학자격을 사범과는 고보 졸업자로, 교원속성과는 나이16세 이상으로, 고등보통학교 제2학년의 과정을 수료한자 또는 동등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되어있었다 (제14조) .
이 규정에 따라 우리학교에도 사범과가 부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졸업생은 다수가 이곳을 거쳐 보통학교의 훈도(보통학교교원의 직명)가 되었다.
그 당시 보통학교 교사들은 금테모자에 칼을 차고 다녔다.
또 교사의 대우도 간임관(현 공무원「계장」급)이어서 학생들의 선망의 대장이 되었다.
이 당시 배출된 교사들은 1930년대까지는 보통학교교장 혹은 도의 진학으로서 우리나라 초등교육계의 중진이 되었다.
그리고 사범과를 거친 사람도 중학의 교유가 되기 위해 일본의 고등사범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일본에는 동경과「히로시마」 (광도)의 두 곳에 고등사범학교가 있었다.
최현배, 박관수(12회·전대구사범교사),조재호 (16회·전 서울교대학장), 이태규 등 훗날 교육계·학계에서 크게 활약한 동문들은 모두 고등사범출신들이다.
조선교육령실시 후에도 실제로 교과목 및 교육과정에 있어서는 종전의 고등학교와 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종전에 비하여 일본어의 교육비중이 휠씬 커졌다.
우리나라말과 한문시간이 주당 3시간이었는데 반해 일어시간은 주당7시간이나 되었다.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한국인을 일본인화 하려는 식민지교육정책은 이렇게 착착 진행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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