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제71화 경기80년-<제자-필자>정구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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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는 계산소학교(현 대동상고자리)를 졸업했다. 계산학교는 우리 나라 개화운동가인 유길준(갑오개혁 때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유성준형제가 설립한 귀족학교로 설립자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배일사상이 강했다.
때문에 의식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 학교를 거쳐나갔다. 일석 변영태(작고·전국무총리)가 나와 한반이었고 고영순(작고·의사)·유억겸(작고·미군정 때 문교장관), 그리고 내 사촌아우인 정구영(전공화당 총재·4, 6, 7대 국회의원)이 한반 아래였다.
내 삼촌이고 정구영의 부친인 정석용은 대한제국 군대에 해산령이 내린 1907년 당시 내부대신 이지용으로부터 전북순창군수에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마다하고 낙향해 버렸다. 구한말 군수를 지낸 내 선친(정일용)도 일제의 간섭이 노골화되자 관직에서 물려나 은거하고 있었다.
이같은 환경 속에서 우리집안 4형제는 일찍부터 외국어공부를 했다. 내 친형인 구창(구한말 판사·후에 변호사)은 영어를, 사촌 구평은 일어를, 구동은 한어를 각각 공부했다. 나는 계산학교를 다니며 일어강습소에 나갔고, 구영은 계산학교 졸업 후 외국어(영어)학교에 다녔다. 이렇게 형제가 일찍부터 외국어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집안어른의 권고 때문이었다.
선친은 『장차 세상이 달라질 거다. 일본은 이미 발을 들여놓았고 아나사와 중국·영국·미국이 언제 들이닥칠는지 모른다. 이처럼 격변하는 세상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훈계했다.
내가 영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은 한반도를 삼키려는 일제의 야욕이 극에 달했던 1909년이다.
당시 보통학교 수업연한은 4년제였으나 나는 이른바 우수학생으로 추천되어 3학년만 마치고 동급생들보다 1년 먼저 한성고보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지난 회에서도 썼지만 을사보호조약체결이후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감은 극에 달했다. 때문에 일본인의 주도 밑에 움직여 일본어를 주요과목으로 가르치는 관립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더우기 계산학교는 한일합방 후 일제가 내린 남작의 작위를 거부한 유길준이 설립한 학교이기 때문에 당시 계산학교 졸업생들은 관립이나 공립을 기피하는 경향이 높았다.
그렇지만 이같은 민족감정에도 불구하고 내가 입학한 당시만 해도 필기시험에 의한 입학경쟁은 치열했다. 관립 한성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낙제한 사람이 모 전문학교에 다니는 형편이어서 당시 재학생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내가 굳이 한성고등학교를 선택한 것은 명성 탓도 있었지만 졸업 후 대학진학을 위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보성학교(현 고려대)·양정의숙·보인학교·보성중학교 등 일본침략에 나라를 구하려는 선각자들이 세운 사립학교가 많았으나 한국인이 설립한 사립학교 출신들은 일본 등지의 상급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얻지 못했다.
4년제인 한성고등학교출신도 자격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극소수 우수한 학생의 경우에는 학교장의 추천 등으로 진학의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1909년 한성고등학교입학생은 모두 60명. 박창훈(경성의전 졸·의학박사·작고)·이정혁(변호사)·주영진(의사·전 광제병원장·작고)·권희목(경성의전 졸·1919년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하다 작고·문기선(경성지방법원장·작고)등이 당시 한반에서 공부하던 급우들이다.
내가 입학할 당시는 5대교장 이원용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홍석현이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대한제국시대에 재직한 마지막 한국인 교장이다.
지금 기억나는 교사로는 허섭·김하정·이원용·이윤희·주형환·정영진, 그리고 일본인 고교형 등이 있다.
1909년 입학하여 한해를 보내는 동안 대한제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해 10월에는 초대 통감이던 「이또」(이등박문)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다.
일본은 육군대신으로 있던 「데라우찌」(사내정의)를 2대 통감으로 임명해 2개 사단이나 되는 군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다.
또 한국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인 헌병 2만2천명과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채용, 한국의 군사·경찰권까지 그 지휘하에 두고 강력한 헌병기구로 국내 곳곳에서 일어나는 의병봉기를 진압하려 했다.
이리하여 1910년8월22일 이완용과 한일합병 조약을 맺고 29일에는 국내 요소 요소에 군대를 배치, 엄중한 경계 밑에 이를 발표해 우리백성은 나라 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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