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고 수학교실은 사방이 칠판 … 어? 친구는 이렇게 푸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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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정고 수학교실에 들어서면 네 면에 화이트보드 14개가 달려 있다. 학생들은 각자 문제를 푼 뒤 다른 친구의 풀이법과 비교하며 수학의 원리를 익힌다. 오른쪽은 수학담당 박윤근 교사. [오종택 기자]

“수십만 개의 정보, 즉 빅데이터를 점이나 직선으로 간단히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아세요? 다들 그렇게 싫어하는 미분(微分)뿐입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수학과를 졸업한 김지원(29)씨는 삼성이 스무 살 때부터 입도선매한 ‘초일류 인재’다. 그가 이렇게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수학 덕분이다. 특출한 수학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마치고 ‘삼성이건희장학생’ 1기로 미국 MIT에 입학했다.

 공부를 마치고 입사한 삼성종합기술원에서도 그는 고속 승진코스를 밟고 있다. 입사 5년 만인 2012년 과장으로 진급해 현재 ‘과장 3년차’다. 남들이 사원 4년, 대리 4년을 거쳐 과장이 되는 것에 비해 3년 이상 빠른 셈이다. 그는 현재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결합한 ‘컴퓨터 비전’이란 융합산업을 연구 중이다. 범죄·교통사고 등이 발생했을 때 수학이론을 활용해 폐쇄회로TV(CCTV)나 블랙박스 영상을 분석하는 분야다. 디지털화 영상을 확대하면 네모 모양의 작은 점 수천~수만 개가 연결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복잡한 점·선으로 된 영상을 미분과 적분(積分)을 사용해 매끄럽고 선명한 영상으로 만드는 게 핵심 기술이다.

 하지만 김 과장도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땐 주입식 수학교육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중1 중간고사 때 전교 60등, 과학고 첫 시험에선 꼴찌였다. 그는 “과학고 시험에서 1등을 한 친구에게 수학 문제의 원리를 물어봤더니 제대로 설명을 못 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앞으로 열릴 사물인터넷(IoT) 시대, 초연결사회를 선도하기 위해선 수학교육 강화가 필수적인데, 현재 한국과 같은 교육 시스템으론 미래 인재를 키우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교에선 김 과장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새로운 수학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1일 오전 서울 양천구 양정고 수학교과교실. “다들 나와서 문제를 풀어보자.” 박윤근(42) 교사의 말이 떨어지자 책상에 앉아있던 고3생들이 교실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교실 앞뒤, 양옆 벽에 달린 14개의 화이트보드 앞에 자리 잡고 문제풀이를 시작했다.

 풀이법은 제각각 달랐다. 도형을 그리는 학생, 복잡한 수식을 길게 써내려가는 학생…. 한 문제를 놓고 11명의 학생이 5개의 풀이법을 내놨다. 박 교사는 독창적인 풀이법을 낸 학생이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도록 했다. 박 교사는 “혼자 문제를 풀다 보면 정답만 확인하고 넘어가기 쉽지만, 다른 친구의 풀이법을 함께 보면 원리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양정고는 5년 전 이 같은 ‘수학 전용 교실’을 처음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진짜 수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자”는 수학교사 출신 김창동(58) 교장의 아이디어였다.

지난해엔 미니 화이트보드가 달린 특수책상도 만들었다. 주로 1·2학년 학생들이 도형을 배울 때 쓴다. ‘직교하는 두 원기둥이 겹치는 부분의 부피를 구하라’ 같은 문제가 주어졌을 때 학생 4~5명이 함께 도형을 그리고 토론하면서 문제를 풀 때 사용한다.

박 교사는 토론수업의 장점으로 “수학을 어려워하는 아이들과 잘하는 아이들이 서로 보고 배울 수 있다. 우열반을 나누지 않고도 기초수업부터 창의성·수월성 교육까지 한 교실에서 모두 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실제로 이 학교 최한울(18)군은 “중학생 땐 수학을 싫어했는데 토론·발표 수업을 하면서 실력과 자신감이 늘었다”고 말했다. 또 “과학탐구 등 논리적 사고가 필요한 다른 과목에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양정고는 올해 2학기부터 ‘수학 놀이판’ 프로젝트도 시작한다. 수학교과교실 앞 대형 칠판에 교사가 수학 문제를 적어두면 학생들이 오가다 보고 자유롭게 문제를 푼 뒤, 칠판 앞 나무상자에 자신의 풀이법을 넣어두고 가는 식이다. 교사는 나중에 가장 창의적으로 문제를 푼 학생을 골라 상을 주게 된다. “학생들이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수학으로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다.

 전남 광양제철남초등학교도 2012년부터 토론식 수학수업을 도입했다. 이 학교 박건하(45) 교사는 “수학은 토론하기 가장 좋은 과목”이라며 “이 답이 왜 나왔는지, 수학자가 만든 공식과 다른 식을 만들 수는 없을지 등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박 교사는 진도를 나가기 전에 먼저 학생들에게 ‘기습 질문’을 던진다. “소수(素數)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부피 구하기는 실생활에 어떤 도움이 될까” 등이다. 아이들은 5분 동안 자유롭게 생각한 뒤 그림 등을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한다. 고학년 학생들에겐 그룹별 문제를 주고 토론을 통해 함께 답을 내도록 한다.

 박 교사는 “요즘은 아이들이 학원 선행학습으로 기계적인 계산은 잘한다. 하지만 직관적·경험적 사고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왜 이런 답이 나왔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당황한다는 것이다. 박 교사는 “토론식 수업을 통해 ‘다 안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몰랐던 점을 발견하고 아이들이 ‘마음의 지진(心震)’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새로운 수학교육을 위해선 교사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최영기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토론식 수업은 미국 대학 박사과정에서 시작됐다. 초·중·고 교실에 적용하려면 교사가 먼저 치열하게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교사가 열정과 진지함을 보이면 학생들이 토론 과정에서 그런 태도를 고스란히 닮게 돼 교육 효과가 크다”고 덧붙였다.

글=김영민·신진 기자, 박은서(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인턴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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