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방독면 쓰고 자라, TV시청 열외 … 흔적 없는 '정신적 구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여름에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 덮게 하고 일찍 취침을 시켰다. 이불 속에서 움직이기만 해도 욕설이 난무했다.”

 최근 군을 전역한 정모(24)씨의 경험담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땀띠가 너무 많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선임병들이 이불 위로 때리니 멍도 잘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군이 잇따른 구타·가혹행위 근절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병영 내에선 교묘한 후임 길들이기 방식이 판치고 있다.

 물리적 접촉은 없는 대신 인간적 모멸감이나 소외감을 느끼도록 하는 신종 가혹행위 수법들도 등장하고 있다. ▶밥에 물을 말아 먹이거나 싫어하는 반찬을 몰아주고 다 먹게 하기 ▶TV 시청시간에 혼자 벽 보고 앉아 있게 하기 ▶선임병 근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기 ▶체육이나 작업시간에 열외로 왕따 시키기 등 고통을 주는 방법도 다양했다. 예비역 병장인 김모(21)씨는 “물리적인 구타는 줄었다고 하지만 가혹행위는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데 그걸 막을 수 없다”며 “밥 먹을 때 특정 메뉴를 못 먹게 하거나 은근히 따돌림을 시키거나 사역을 특정인에게 몰아주는 식으로 티가 나지 않게 후임을 괴롭힌다”고 했다. 박모(28)씨는 “잠잘 때 코 고는 소리가 크다고 방독면을 씌우는가 하면 불침번을 시켜서 못 자게 계속 깨우라고 시켰다”고 토로했다.

 예비역 병장 이모(22)씨는 “아직까지도 계급별로 차별이 남아 있다”며 “신병은 비누를, 이병은 샴푸를 못 쓰게 한다거나 상병 이상만 로션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소규모 부대보다 대규모 부대에서 병사를 관리하기 힘든 곳일수록 부대원들 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잔혹한 폭행과 가혹행위도 여전하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군 인권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강원도 철원의 모 부대 소속 A 일병은 선임들이 6개월간 지속적으로 뺨을 때리고 머리 박기를 시키는가 하면 욕설과 성추행을 반복했다고 인귄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B씨(28)는 “군 복무 중 선임들에게 몽둥이와 전투화로 머리 등을 폭행당했고 거의 매일 욕설과 가혹행위,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며 “전역 후에도 폭행에 대한 악몽과 불안증세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정신장애를 갖게 됐다”고 호소했다. C씨(26)는 “복무기간 중 선임자에게 속옷을 자주 갈아입지 않는다고 엎어치기를 당해 이가 2개 부러지는 등 거의 매일 2~5회 가혹행위 및 폭행을 당했다”고 인권위에 진정서를 냈다. “선임병이 잘 때 자기 침낭으로 들어오라 하고 여기저기를 만져 수치심을 느꼈다”는 성추행 증언도 나왔다.

 육군은 2003년 각 부대에 하달한 ‘병영생활 행동강령’을 통해 분대장을 제외한 병사들끼리는 서로 명령을 하거나 지시, 간섭을 할 수 없도록 했다. 2005년에는 ‘가고 싶은 군대, 보내고 싶은 군대’를 구현하겠다며 야간 점호를 없애고 신병교육대에서 훈련받는 병사에 대해서도 현역복무 부적합 판정을 내려 보충역으로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육군이 지난 4월 전 부대를 대상으로 병영 부조리 실태 조사를 한 결과 3900여 명이 가혹행위에 가담하는 등 병영 내 부조리가 여전히 심각하다고 밝혔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구호처럼 나오는 대책들이 공염불이었던 셈이다.

 군 조직의 속성을 감안할 때 군대 안의 폭행·가혹행위를 없애기 위해선 피해를 양성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대표 대표는 “폭행사건이 발생하면 지휘관부터 문책하려 하니까 지휘관은 일단 숨기려고 하는 것”이라며 “부대 내 구타나 가혹행위를 적극적으로 적발하는 지휘관에게는 책임을 경감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권필·정원엽 기자

[사진 김경빈 기자, 뉴시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