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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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나는 거의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는 서울내기였다. 그리고 부모들 역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도회지 사람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영등포에서 자라면서 어머니가 은근히 노동자의 아이들과의 구별성을 심어주려고 애썼던 것은 그런 이들의 생활을 먼발치에서만 보고 가졌던 편견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몰락했다거나 뿌리를 뽑혔다거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 스무 살이 넘어서야 고되게 일하는 삶의 생생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회지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에서 우리네 산하의 아름다움과 함께 자신을 다시 발견해가는 과정이었다.

동진강 주변의 드넓은 갈대숲과 개펄에 하얗게 널린 철새의 무리들은 자유롭게 하늘과 바다와 들판 위를 날아가고 또 날아 내렸다. 이제 날씨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날일조에서 제방 끝에 나아가 등태를 짊어지거나 삽질을 하다가 허리를 펴면 어느새 하늘과 바다가 갈라진 수평선에는 노을이 가득 찼고 철새와 갈매기가 아득하게 먼 하늘 속에서 울며 날아왔다. 나는 낯설었던 사람들을 내 가슴 깊숙이 끌어안았다. 이것은 청년 고리키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대초원의 황무지와 시베리아에서 자기 시대의 인간을 발견해 가는 과정과도 같았다고나 할까.

바닷물이 제방의 돌벽을 때려 포말을 일으켰고, 돌 위에 엉성하게 놓인 선로를 따라 궤도차는 무개화차를 길게 끌고 달려갔다. 디젤 엔진의 궤도차에서 들리는 발동소리, 신호종 소리와 십여 칸의 무개화차 위에 가득 실은 돌무더기 위에 올라앉은 인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검은 바다 위에 야광충의 작은 인광들이 반짝였으며 솜방망이 횃불의 일렁이는 불빛이 꼬리를 끌며 수면 위를 스쳐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함바의 인부들이 탄 궤도차가 나란히 달렸는데 기관사들은 인부들의 기분에 맞추어 서로 속력을 내어 앞지르기 내기를 했다. 화차에 올라탄 인부들이 기관사를 격려하느라고 목청을 돋우어 외쳐댔다. 선로가 한 가닥으로 합쳐지는 곳에 가까워지자 양편 화차의 고함소리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들 일행이 탄 궤도차가 먼저 새로운 선로에 들어섰는데 저쪽은 선로 입구에서 앞선 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게 되자 우 하는 소리와 상대를 서로 야유하는 소리들이 요란했다.

동혁은 횃불을 휘둘러 자기네가 제방의 끝에 이르렀다는 것을 뒤차에 알렸다. 바다 위를 뒤덮은 어둠은 끝 간 데 없었지만 가끔씩 어둠 가운데서 흰 물결의 이랑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횃불에 반사된 제방 가녘의 물속이 맑게 비쳐졌다. 그는 이런 광경을 누군가 멀리서 바라보게 되면 아마도 소리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이 가까운 어느 날 대위와 나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우리가 도착했던 돈지 읍내로 나갔다. 우리는 조만간 이곳을 뜨기로 작정을 해둔 터였다. 나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엽서 한 장을 써서 우체통에다 집어넣었다. 나중에 이십여 년이 지나서 화가 여운이와 부근을 지나다가 생각이 나서 들러 보았더니 서부영화에 나오는 고스트 타운처럼 읍내는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퇴락한 집 몇 채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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