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노송밑에서 | 글·그림 이종상<동양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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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후텁지근한 장마철이라서 먹물을 풀어놓은 듯한 잿빛 하늘은 금세라도 무너질 듯 머리 위를 짓누르는데 사방을 둘러 봐도 그저 그늘지고 눅눅한 것들 뿐이라 마음이 가위눌린 듯 답답하기만 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무엇 하나 뾰족하고 신통한게 없으니 화실에 틀어 박혀 두문불출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오늘은 진 종일 퍼붓던 비가 해질 무렵에야 뜸해지더니 점점 구름이 엷어지면서 하늘에 파란 구멍이 뚫어지기 시작한다.
창 너머 느티나무 겨드랑 틈새로 제법 붉게 물들여진 놀빛이 새어들어 댓잎 끝에 매달린 빗방울에 떨어지면서 눈부시게 부서져 나간다.
참으로 오랜만에 볼 수 있는 무지개 빛깔이다.
나는 갈던 먹을 접어두고 작은 「스케치·북」을 손에 든 채 뒷산 계곡을 오른다.
비에 흠뻑 젖어 짙푸르러진 솔밭 너머로 물기 어린 너레바위가 유난히도 가깝게 다가선다. 이끼 낀 바위 틈바구니로 흘러내리는 여울물 소리에 묻어오는 산비둘기 소리랑 뻐꾸기 울음이 석양에 비껴진 초록빛 계곡에 서럽게 울려 퍼진다.
물방울이 조롱조롱 매달린 풀숲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붉은 비늘로 용틀임을 하고 있는 늙은 솔밭새로 학도암의 추녀 끝이 빼끔히 올려다 보인다. 나는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할 때면 곧잘 이곳에 혼자 올라 천년 묵은 노송 앞에 서기를 좋아한다.
암자의 기와지붕이 저만큼 발아래 굽어보이는 쌍솔바위에 앉아 한없는 생각에 잠겨버린다.
그 옛날 이 늙은 솔가지에 수없이 날아들었던 선학들의 날개짓들을 눈앞에 그려보며 억겁 속에 묻어간 시간의 흐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며 영겁으로 이어지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나로 하여금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두손을 모으기도 한다. 이렇게 한동안 앉아있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숲속에 냉기가 서려 삼복을 잊고 사니 피서란 나에게 호강스런 얘기다.
아직도 발 밑에 솔걸을 헤치면 한 자나 쌓인 학똥이 따사롭게만 느껴지는데 청송에 노닐던 백학은 간데 없고 노적송 빈가지만 허공에 뻗쳐 있다.
기왕에 깃들지 않는 백학일랑 아예 잊고 기다리다 지쳐 늙은 저 소나무 서 있는 뜻을 그림에나 새겨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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