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1)<제69화>한국은행-대전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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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7월12일, 미군은 조치원을 포기했다. 공산군은 금강에 육박했다. 서울의 경우와는 달리 대전에서는 전시민을 미리 피난시켰다. 대전시내의 전 금융기관도 7월14일 대전을 철수했다.
가족이 달린 직원은 그 직책여하를 불문하고 모두 먼저 피난시켰으며 단신자들도 대리1명과 행원 서너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대구로 내려보냈다. 김일환 대령의 힘을 빌어 사람은 물론, 중용 장부·문서를 고스란히 대구로 옮길 수 있었다.
군자금뿐만 아니라 군수물자 통제를 책임맡은 김대령은 대전에 내려오자 군량미 확보에 여념이 없었다. 각지의 금융조합(농협의 전신)을 동원해서 충청남북도 일대의 쌀을 가능한 한 조치원으로 집중하여 대전을 거쳐 남쪽으로 수송했다.
김대령은 18일까지 대전역에서 군량미 기타 군수물자를 남으로 수송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한국은행의 잔류인원은 17일까지 은행문을 열고 18일 아침 장기영 조사부장 지휘아래 대전을 출발했다.
나는 신성모 국방장관과 함께 대전을 떠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대전에서의 20일 동안 신장관과 김대령과 나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며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부도 군자금을 비롯한 한은의 기능을 필요로 했고 ,한은도 군부의 도움 없이는 옴짝달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장관이 18일 정오에 비행기로 같이 떠나자고 하므로 나도 그럴 작정을 하고 있었으나 18일 오전 황망중에 연락을 하고 어쩌고 하는 것도 번거로와 비행기를 포기하고 승용차로 혼자 대전을 떠나게 되었다 .대전역 앞을 지나는데 당시 경전(한전의 전신) 사장이었던 고재봉씨가 홀로 서 있었다.
자부가 해산을 했기 때문에 자가차에 태워보내고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중이란다. 같이 타고 남하하는데 이미 민간인은 보기 드물었고 미군의 군용차량과 병사들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길이 막혀 김천까지 가는데 2시간이 더 걸렸다.
기진맥진,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하여 김천에서 한 발짝도 더나가고 싶지 않았다. 6월 25일이래 밤이고 낮이고 잠시도 심신의 긴장을 풀어본 적이 없었다 .공산군이 대전에 육박하고 있던 어느날 밤 이런 일이 있었다.
김유택 재무차관·하재용 금융조합연합회장과 한방에서 잠을 자는데 한밤중에 김차관이 흔들어 깨는 바람에 눈을 떴다. 김차관은 어디서 『와-와-』 하는 함성 비슷한 소리가 들리는데 저게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둘이서 숨을 죽이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국방장관한테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되겠다고 한밤중에 신장관을 찾아가 물었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가 『신 장관 말로는 아직 그토록 급박하지는 않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김·하 두사람은 깔깔거리고 웃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간 다음에 금이 정신을 가다듬고 가만히 살폈더니 『와-와-』 하는 소리는 공산군의 함성이 아니라 바로 하의 코고는 소리였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박장대소했지만 그 때는 모두들 그토록 심신이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낮에는 낮대로 은행권대책 기타 쉴 새없이 닥쳐오는 크고 작은 문제로 해서 촌시도 마음을 놓을 겨를을 가질 수 없었다.
대전을 출발해서 할 일없이 차에 몸을 맡기게되자 심신의 긴장이 풀리면서 쌓이고 쌓였던 피로가 일시에 엄습했던 모양이다. 피곤을 감내할 수 없었다.
김천시내에 들어서자 식산은행 김천지점장 사택을 찾아갔다. 물론 지점장과 가족은 다 피난을 해서 빈집이었지만 이 집에 들어가 목욕탕에 물을 받았다. 헌병이 쫓아와 빨리 남하하라고 몰아 세웠지만 나는 더 이상 꼼짝도 하기 실으니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갈 작정이라고 했다.
헌병은 여기 있다가는 죽는다고 야만을 쳤다. 죽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정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직 목욕을 하고 푹 쉬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땔감을 찾아 물을 데워 목욕을 한 다음 끼니도 거른 채 세상만사를 잊고 곤히 잠들었다.
한잠 자고 다음 날 새벽 일어나니 대전의 피곤은 가시고 새기운이 돋아나는 듯 했다.
19일 새벽5시쯤 김천을 출발하여 대구에 도착했다.
먼저 내려간 직원들은 7월16일, 정식으로 임시본부를 대구에 설치하고 새 한국은행권의 발행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7월19일, 대구에 도착하자 나는 한은법 제26조에 의하여 금융통화위원회의 권한을 대행 한국은행권 발행에 관한 긴급조치안을 결재했다. 그리고 이를2O일 공고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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