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조금 모금'에 학부모 속앓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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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금(선생님 보충수업 지도비) 1억1천4백75만원' '청소 용역비 1천2백80만원' '화장지.비누.물비누 1백75만원'….

경기도 안양시 A고 학부모회가 지난 1년 동안 작성한 '수입.예산내역서'에 깨알 같이 적혀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학부모회가 학생당 30만원씩 걷어 교사들의 보충수업 보조금이나 학교 청소 비용, 비품 구입비 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돼 있다.

심지어 이 학교 학부모회가 만든 'A고 수첩'엔 학생 이름 옆에 '★' '☆' 등의 표시가 붙어 있다. ▶임원 학부모는 검은 별▶돈을 낸 학부모는 하얀 별표가 있고▶금전적 기여를 하지 않은 학생의 이름엔 아무런 표시가 없다는 게 이 장부와 수첩을 입수한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의 주장이다.

이 단체는 15일 "A고교는 지난해 학부모 9백여명으로부터 2억3천여만원을 불법 모금했으며, 올해도 3억원을 목표로 학생당 30만원씩 할당했다"고 주장하며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이어 16일엔 이 학교를 '불법 찬조금 모금' 혐의로 교육인적자원부와 감사원에 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일부 초.중.고교가 부족한 학교 운영비를 충당하거나 학교 시설물을 교체하는 데 학부모들의 주머니에 의존하는 일이 부쩍 잦아져 학부모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예전처럼 학부모들이 은밀하게 촌지를 건네는 관행은 거의 사라졌으나 학부모회에서 모든 학부모에게 할당하는 모금이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촌지 집단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손 벌리기 백태=서울 D고 학부모 윤모(54)씨는 최근 학부모회의 모금 요구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윤씨는 "학급당 1백만원 조성을 목표로 학부모 개개인에게 돈을 할당하고 있다"며 "명목도 선생님들의 회식 경비나 수고비로 쓰겠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고 고충을 털어놨다.

학교 측에 확인 결과 학생들의 교내 행사 때 빵이나 음료수를 보조한다는 명목으로 학부모회가 실제로 돈을 모금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에 접수된 부당 찬조금 모금 신고사례를 보면 지난해 발생한 50건 중 상당수가 교사들에 대한 수고비조로 학부모회가 중심이 돼 돈을 걷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 B고의 경우엔 학생당 50만원씩 내도록 해 교내 논술과외 강사료로 썼으며, 서울 A고에서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에 대해 수고비 명목으로 학생당 20만원씩 할당됐다.

서울의 또다른 D고는 학교측이 가정 통신문 형식을 빌려 학생용 의자 구입, 방송실 기자재 구입 등 시설비를 학부모들이 부담하도록 했다.

◆왜 그런가=찬조금 모금 등을 둘러싼 학부모들의 불만과 반발은 1996년 학교발전기금 모금이 합법화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학교 측이 부족한 운영비를 학교발전기금에 의존하면서 이 같은 관행이 급속히 번진 것이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의 박범이 교육자치위원장은 "학부모회 등이 학기 초부터 반강제적인 찬조금 모금에 나서면서 일부 학부모에게 한정됐던 촌지가 전체 학부모를 대상으로 집단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행 초중등교육법에 따르면 학교 발전기금은 자발적인 갹출을 원칙으로 하며 학부모를 상대로 일정액을 할당하거나 갹출금의 최저액을 설정하는 일은 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그러나 학부모 단체에 신고가 들어간 학교들은 "학부모회가 한 일이며 학교 측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경기도 안양 A고의 李모 교장도 "학부모 단체가 보충수업지도비.청소용역비를 거뒀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라며 "학부모회가 자발적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학교 측과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강홍준.하현옥 기자

****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란

89년 9월 창립됐으며 회원수 1만명인 국내 최대 학부모단체(www.hakbumo.or.kr)다. 교육주체로서 학부모의 역할을 자각하고, 교육계의 해묵은 문제점을 학부모들의 참여를 통해 개선한다는 게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이다. 최근엔 전교조와 함께 교육계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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