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정치발전」 가로막는 「경제불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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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2년 EEC가입에 기대 걸지만 불서 제동>

<경제위기는 세계불황의 여파, "프랑코 때가 좋았다"는 건 오판
「마드리드」를 방문한 지난4월말 그곳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이른바 「4월 위기」설에 집중돼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수아레스」 정권은 민주화라는 정치작업에 진력하다 보니 경제분야에 중첩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 문제들이 금년 들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돼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4월 중 경제각료를 바꿀 계획이었는데 그 주 대상인 경제담당 부수상의 이름이 또「아브릴」(Abril) 즉「4월」이어서 각 신문들은 『4월 위기설』을 사설로 다루고 있었다.
그 후 내각개편은 이루어졌지만「스페인」의 경제적 고민이 쉽게 해결될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비관적 경제전망은 앞으로의 정치전망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
「마드리드」대학의 정치학교수「산타·마리아」씨는 「프랑코」 사후에 몰려온 경제위기에 대해『「프랑코」는 참으로 교활하게 자신의 죽을 때를 잘도 골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60년대를 통해 「유럽」을 휩쓴 경제 「붐」덕분으로「프랑크」시대의 후기는 「스페인」에 전례 없는 번영을 몰아왔던 것이다.
그것은 꼭「프랑크의 경제정책이 지혜로 봤기 때문이기보다는 「스페인」이 위치한「유럽」 변방의 입지조건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73년 석유파동이 닥쳐 전 세계경제가「인플레」와 불황의 이중고에 허덕이게되고 그 여파가 「스페인」경제에 밀어닥치기 시작한 때 「프랑코」가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사람들은 단순하게 『「프랑코」때는 잘 살았는데 그가 죽고 나니 못살게 되었다』 는 잘못된 판단을 하기 십상이라고 이 교수는 걱정했다.
「스페인」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71년에 1천「달러」선을 넘고「프랑코」가 죽은 1975년에 2천1백27「달러」가 되었다.
1965년부터 1975년 사이 GNP는 연평균 6·9%의 「유럽」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고도성장을 이룩한 데 비해 「프랑코」가 죽은 후 2·1%로 줄었고 지난해에는 O·5%를 기록했다.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4천7백58「달러」로 「프랑코」가 죽은 해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지만 연 평균 19%를 기록해온 「인플레」 때문에 실질 구매력 면에서는 오히려 그 때보다 줄어들었다는 일반적인 불평이었다.
「프랑코」 말기에는 「스페인」노동자가 1백만 명 이상 「유럽」각 국으로 진출, 이들이 보내오는 송금액이 무역적자의 대부분을 메워 주었는데 「유럽」자체의 실업률이 높아감에 따라 이들이「스페인」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들 귀환노동자들은 본국의 실업률을 더욱 부채질해서 현재「스페인」의 실업률은 최상위권인 9·6%까지 올라가서 정치불안의 중요한 잠재요인이 되고있다.
「스페인」이 겪고있는「인플레」, 무역수지불균형 및 실업문제의 삼중고는 사실 온 세계가 다같이 겪고있는 어려움이지만「스페인」의 경우 1980년대 초반에「유럽」공동시장 (EEC) 에 가입하려는 시간표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전반적인 경제여건이 크게 호전될 것으로 기대하고있다.
「스페인」이 여러 가지 내부갈등 요인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착실히 추진해 온 것과 군부가 좌파의 극렬한 「테러」행위에도 불구하고 정치개입을 엄격히 자제해 온 것도 사실은 EEC에 가입할 정치·경제적 자격을 갖추어야 된다는 절박한 필요성을 스스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코」가 남기고 간 나쁜「이미지」에다가 군부「쿠데타」가 일어날 경우「유럽」여론이「스페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뻔한 노릇이니 말이다.
그런데 늦어도 1982년쯤에는 「유럽」 의 일원이 되리라는 「스페인」의 기대는 최근 「스페인」 가입을 반대하겠다는「프랑스」의 태도변화로 난관에 부닥쳐 있다. 「스페인」의 과일과 야채가 EEC역내에 공급될 경우 「프랑스」농민이 큰 피해를 받게되리라고 우려하는 「지스카르-데스탱」「프랑스」대통령의 반대의사는 그래서「스페인」 정치인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직접 관련은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야당은 주로 경제분야에서의 실정을 이유로 최근 의회에서「수아레스」정권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이 불신임안은 부결되었지만「프랑코」사후의 어려운 정치발전 과점에서 집권당에 협조해온 조야 간의 『합의정치』가 이를 계기로 깨졌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독재자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번영의 꿈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주변여건이 별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그동안 애써 성숙시킨 민주화의 업적이 아주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는 것이다.
【장두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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