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사회정의 없다고 단정 안 했다-정효 스님에게 드리는 글 &"자비존중 용감한 역사 못 꾸린 것 같다"가 와전|조상의 귀한 유산 헐뜯을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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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4일 남장사 향로전에서 쓰신 글월 반가이 받아 정성스럽게 읽었습니다. 글 첫머리에 적으신 말씀은 내게는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는 아름답고 고마운 말씀이었읍니다.
스님께서 내게 글월을 띄우신 까닭은 지난2월29일 어느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이 관동 클럽에서 김종필씨가 기자들과 1문1답을 하는 가운데 기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전 기독교신자인 김동길 교수가 YMCA 시민논단에서 이 나라에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것은 유교와 불교 영향 때문이라고 하였다는데 김 총재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스님께서는 이 나라에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책임의 일부를 내가 불교에 돌렸다는 사실이 섭섭해서 그 글을 적어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내 생각이 정말 그렇다면 스님께서도 그 일을 섭섭히 여기시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고 하겠읍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강연에서 한말이라고 주장하는 그 말을 내가 정말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글을 써서 책으로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글이 인쇄되는 과정에서 잘못된 활자로 찍혀 영 엉뚱한 뜻으로 둔갑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글도 그런데 하물며 바람결에 한번 울리고 퍼지면 영영 사라져 다시는 잡을 길 없는 남의 말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받아 적었다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옮겨 전해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고 탄식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이 글을 적는 것도 혹시 말 많은 세상에 더 말을 많은 세상에 더 말을 많이 하게하는 계기를 만들지나 않을까 염려되는 바도 없기 않습니다.
대중의 관심이나 호기심을 자아내기 위하여 특정한 인물의 말의 꼬리를 물고 늘어져 한바탕 싸움을 붙이는 경우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구경거리 중에도 구경거리가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하는데,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고의로 남의 집에 불을 지를 악한은 없지만 보기에 멀쩡한 사람이 갑과 을의 말싸움을 붙이는 일에만은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게 있습니다. 싸움구경도 재미는 재미니까요.
스님은 수양하는 젊은 수도 중이라 극히 낮은 목소리로, 종교와 종교사이의 이해나 협력을 간절히 호소하셨는데 나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내가 불교를 얼마나 안다고 주제넘은 판단이나 해석을 하였겠읍니까? 조장의 종교적 유산을 헐뜯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노릇입니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날 그 강연회에 나가 사회정의를 역사적으로 물이 하면서『우리의 불교는 자비를 강조하였고 우리의 유교는 질서를 존중하였으므로 우리의 전통사회가 정의를 앞세워 피를 흘리는 용감한 역사를 꾸려 나가지는 못한 것 같다』는 뜻을 표명한 일은 있지만 불교나 유교에는 경의가 없다고 잘라서 말한 일은 없었읍니다. 나는 싸움에는 의욕이 없읍니다.
스님, 송광사의 법정과 같은 착하고 의로운 이를 가까운 친구로 가진 내가, 아니 할 일이 없어 친구의 귀한 종교나 헐뜯고 않았겠읍니까? 스님도 신문에 적힌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오늘도 내 집에 전화를 걸고 그 글에 언급한 어려 사람들이 비슷한 뜻을 전하고 끝에 가서는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수화기를 놓곤 하였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내게 심한 말을 던지지는 않았읍니다.
없는 사실을 있는 사실로 꾸미고 화를 내며 서로 치고 받는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도 우습지 않겠읍니까!
성서에도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있읍니다. 그러나 그 말의 앞과 뒤를 잘 살펴야 그 뜻을 옳게 읽을 수 있습니다. 대가리와 꽁지를 자르지 않고 생선 전체를 보아야지요. 그 말이 사실은 이렇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더라. 』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는 말이죠. 아무렴 성서가 무신론을 가르치기야 하겠읍니까?
스님, 종교가 뿌리보다 잎사귀를 더 소중하게 여겨서는 안될 일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진금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교도 진금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김동길<연대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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