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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멋지게 지는 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84호 27면

각본 없는 드라마. 올 여름은 브라질 월드컵 중계 덕에 스릴있게 지냈다. 며칠 전 영국의 한 신문이 이번 대회에서 나온 ‘베스트 골’ 11개를 추려 명장면으로 보도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국내 방송사도 명장면을 ‘TOP7’으로 엮어 방영하기도 했다. 내게도 하나 꼽으라면 즉시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멋진 골 영상도, 화려한 개인기나 인상적인 응원도 아니다. 네덜란드와 코스타리카가 맞붙은 8강전에서 연장전 혈투에 이은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가 골을 차고 4 대 3으로 희비가 갈리던 순간! 승리의 여신은 네덜란드 편을 들어줬다.

바로 그 찰나, 코스타리카의 한 선수가 십자성호(가톨릭 신자들의 손짓 기도)를 크게 긋는 모습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됐다. 이는 내게 무언의 감동을 안겨줬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만일 월드컵 8강전 승부차기에서 대한민국이 상대팀에 졌을 경우 나는 과연 어떤 식으로 반응했을까. 사제인 나, 더구나 그 무엇보다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 『천금말씨』의 지은이지만 그 순간의 돌발반응이 어땠을지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예단할 수 없다. 어쨌든, 방송 화면에서 목격한 패자의 십자성호는 지금도 내게 그 어떤 위대함으로 각인돼 있다.

상징 행위 속에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차제에 저 코스타리카 선수의 통 큰 상징 행위에서 깨달음의 꼬투리를 주워봄은 어떨까.

우선, 패배자가 그은 십자성호는 ‘감사’의 몸짓으로 읽힌다. 패배의 잔을 마시는 것은 누구에게나 쓰다. 석패한 직후 저절로 분노나 통한의 감정이 생기는 게 범부의 상식이다. 그러기에 저 반사적인 십자성호는 오히려 통쾌한 반전의 묘를 연출한다. 모르긴 모르되, 그것은 “감사합니다, 하느님.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었습니다”라는 눈물의 고백이 아니었을까.

이는 신앙을 넘어 고수의 지혜이기도 하다. 왜? 한계와의 싸움에서 ‘플러스 알파’로 작용하는 단초는 결국 ‘감사’를 아는 마음이기에 그렇다. 감사는 자신의 실존과 성취가 누군가의 도움에 신세지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실패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에 미래를 열어두는 격이 된다.

다음으로, ‘승복’의 몸짓으로 읽힌다. 이 사회에서 패자로 남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냉엄한 승부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이기는 걸 ‘성공’으로 여긴다.

하지만 ‘자~알’ 지는 것도 성공이다. 패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줄 줄 아는 승자가 진정한 승자며, 승자의 손을 치켜세워 줄 줄 아는 패자 역시 진정한 승자다. 전자가 승부에서의 승자라고 한다면 후자는 인생에서의 승자인 것이다. 이런 안목에서 보건대, 저 십자성호는 필경 “졌다! 승부차기도 결국 실력이다”라는 깨끗한 시인이었을 터다. 이로써 그는 더 아름답고 멋진 승리를 기약받은 셈이다.

그리고, ‘축하’의 몸짓으로 읽힌다. 인생에서의 패자는 승부에서의 승자를 죽었다 깨어나도 축하해주지 못한다. 때문에 최상의 명승부는 승자와 승자의 포옹으로 끝나는 법이다. 승부에서의 승자와 인생에서의 승자의 격렬한 스킨십! 상상만 해도 흐뭇해지는 그림이다. “축하합니다, 당신네들 따봉! 4강전 승리를 기원합니다”는 호기로운 선의의 축원이었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공연한 억지일까. 아닐 것이다. 벌써 브라질 월드컵의 열기는 전설이 돼가고 있다. 그러나 한 순간 포착된 코스타리카 선수의 십자성호가 내 심금에 드리운 깨달음은 날로 새롭다.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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