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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80년대」문화(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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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해방과 더불어 도입된 서구의 문물과 제도의 타당성과 정당성에 대한 도전이 집권층에 의해 주도되면서 우리의 전통 찾기 운동이 활발해졌고, 또한 정치제도마저 재래의 문화적 기반 위에서 다시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타의 견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움츠리고 있던 전통주의가 되살아나면서 학문연구에 있어서 불가결한 보편성의 기준을 흐려놓고 말았다.
그러나 80년대의 상황은 달라진다. 비록 한 시대의 종말이 반드시 나은 시대의 시작은 아닐지라도 얼마 전까지 있었던 이 사회의 전면관리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제위기가 국가간섭으로만 해결된다는 이론이 강하지만 고도 생산성의 견지를 위해서 모든 정신적·물질적 자원의 총동원을 명령하는 시대가 다시 오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지난 10여 년간의 통치는 경제성장을 통한 근대화를 추진하는 합리성의 장치를 갖추느라고 사회과학의 분야에 있어서 행정학을 눈부시게 발달시켰다.
큰 종합대학에다 행정대학원을 설치해서 많은 학자와 행정요원을 길러냈었다.
그러나 통치목표가 그랬던 것처럼 목표달성의 조직화와 합리화라는 기능주의의 가치관을 배양했다.
관료기구의 확대로 인간의 위축과 소외가 결과됐고 이에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인간주의를 들고 비판에 나섰다. 80년대는 이들의 활동이 크게 주목을 끌 것이다.
한편 동양철학자들도 유가의 인 사상을 인간주의와 대비하고 있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인이 인도주의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더라도 사회와 개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전자를 전제로 우위에 두고 개인의 자기완성을 극소화함으로써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현대의 가치관과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80년대에는 전통사상에서 현대성을 찾아 이어나가는 것은 바람직하고 민주주의의 이념과 친화력을 갖는 것들을 발굴하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날에도 그랬지만 80년대는 무엇 때문에 학문을 하느냐하는 적합성에 관한 물음이 더욱 더 극렬히 제기되면서 이론과 실제의 결합을 외치는 이른바 실천과학운동이 본격화할 것이다.
심지어 가치판단을 배제했던 일부 분석철학자들마저도 이미 사회철학에 대한 관심을 표면화했으며, 윤리적 진술의 유의미성을 수긍하고 있는 것은 이 시대가 학자의 초연을 허용치 않으며 지성의 정열과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다는 증거다.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철학계는 영미 실증주의의 충격에서 서서히 깨어날 것이며 정신과학의 논리를 정립해갈 것이다. 변증법 해석학 현상학이 그 자체에 대한 연구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과학이론으로서 다루어지는 움직임이 예상된다.
과학주의를 표방해 왔던 정치학에서는 정치철학의 분야가 고전으로서 밀려난 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민주의 물결을 타고 흐르는 사회 비판적 정치분석의 연구태도에 힘입어 80년대에는 되살아날 것으로 보인다. 자유·평등·권리의 제개념이 철학적 설명을 재촉 받으며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적절한 정치적 「이데올르기」의 탐구가 나타날 것이다.
전통 찾기 운동의 와중에서 정치학의 토착화니 한국화니 하는 논쟁이 그 동안 거듭되었지만 학문에 있어서 근본은 인간이며, 정치학은 이 인간이 억압받지 않고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사회의 건설에 그 목표를 두어야할 것이다.
80년대는 대내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우리가 놓여있는 위치를 다시 확인할 계기다. 국제사회가 아무리 동맹을 맺고 우방과 적으로 대립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주종관계로 특징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최근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종속이론인데 이것이 어떤 형태로 수용될 것인가가 주목된다. 개발국이 아무리 발벗고 나서더라도 발전의 도는 뻔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도 고립해서 존립할 수 없고, 다른 나라들과의 상호의존은 당연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제성장과 확대에 의해 우리 나라의 경제가 규정됨으로써 그 나라에 종속된다는 사실은 재식민화의 감을 갖게 할 것이다.
산업화가 몰고 온 문제는 극복하기 어려운 수많은 난점을 안고 있다. 계층의 양극화에 따른 배분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이에 따라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하는 발전사회학이 활발하게 연구될 것이며, 또 노동경제학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가 도모될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근로자의 권리신장과 함께 노동운동의 바람직한 방향을 정리해 주는 이론제시가 전개될 것으로 믿는다.
분단이 학문적 연구의 보수성을 조장해 왔지만 보수와 진보가 마치 남북의 대결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선진자본주의사회에서도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경쟁을 하듯이 시대적 상황의 변천에 대응하여 정치적 「이데올르기」에 있어서도 신축성을 보이도록 해야하며, 이에 관한 사회과학의 종합적인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성은 자율성을 그 내재적 법칙으로 삼기 때문에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를 한번 활짝 펴면 학문의 진실한 뿌리를 내릴 것이며 80년대는 그 역사의 서장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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