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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세들 노력덕에 거의 고등교육 받아|톱스타 유가창 등 예술인도 많이 나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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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건국 후 이 곳에서 태어났거나 자란 젊은 화교 2세, 3세들은 새환경 속에서 우리들 윗세대와는 또 다른 다양한 진로를 걷게됐다. 1세 화교들의 노력덕분에 그들은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본국으로 유학도 갔다. 50년대 이후 본국에서 대학과정을 마친 사람만도 1천명이 훨씬 넘었다.
젊은 화교들중엔 모 연예나 예술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본국이나 한국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살기에 바빴던 1세 화교들에게선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그 대표적 인믈이 한국화교로 30대의 젊은 나이에 자유중국의 「톱·클래스」 영화감독이자 작곡가가 된 유가창씨(38)다.
유가창하면 대만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영화를 연출하고 「히트·송」을 작곡하는가 하면 때로는 직접 무대애서 노래도 부른 만능연예「스타」였다. 만주 「하르빈」 태생인 유씨가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것은 8세때인 49년깨였다.
이후 그는 서울서 살면서 화교학교를 졸업했다. 고교때부터 노래를 잘 부른 그는 KBS전국 노래자랑에서 2위를 차지, 가수가 되었다. 밤에는 미8군 무대에도 출연해 「패티김」등 한국연예인과도 잘 알게 됐다.
그는 또 영화에도 관심을 두어 한국배우전문학원을 졸업했으며 영화감독 김기영씨 밑에서I년반동안 연출수업도 했다.
?북에 유학가서는 「나이트·클럽」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부르며 국립정치대학을 다니다가 본격적으로 영화일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녹음조수·편집 등으로 학비를 마련하다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면서 감독으로 발돋움할 기회를 노렸다.
63년 그는 첫 작품 『육춘지가』를 연출했다. 이것은 실패작이었다. 시사회때 제작사 사장이 보더니 엉망이라며 그대로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빛도 보지 못했다.
2년동안 와신상담한 그는 65년 『생로병사』란 작품으로 재기했다. 15만「달러」를 들여 만든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고 「캄보다아」의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는 등 유씨의 성가를 높였다.
이후 10여년동안 그는 약 60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며 자유중국 최고의 감독으로 군림했다. 75면 그가 한국의 강대선 감독과 함께 만든 반공영화 『설화편편』 (한국제목 『5천리 대동강』)은 그해 「아시아」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으며 본국에서의 흥행성적은 『대부』 를 능가했다.
영화뿐 아니라 가요작곡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한때는 ?북에서 유행하는 가요의 80%가 유씨의 노래였을 정도다.
중국유행음악의 본산이 대북인만큼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싱가포츠」 「홍콩」 등 동남아 전역에 널리 퍼지게됐다. 막강한 동남아화교들의 성원도 대단했다.
그의 최대 「히트」곡은 『매화』란 「월츠」곡으로, 장경국 당시 행정원장, 엄가도총통 등을 비롯해 중국 전국민의 애창곡이 되더니 국민학교 교과서에 까지 실렸다. 노래의 매상액만도 8억여원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씨는 뛰어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으로 한낱 화교고학도에서 백만장자 「스타」 로 출세하게 됐다.
그는 장행정원장과도 「스포티」한 차림으로 척척 만나는 등 많은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성공한 후 그는 축 ?북에서 살았지만 제2의 고향을 잊을 수 없어 때때로 한국을 찾아 옛 친구와 화교친지들을 방문하곤 했다. 지금은 미국에 건너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밖에 본국으로 진출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예술활동을 펴는 사람들중엔 동양화가 소?모성수씨(49)와 ?송당 조윤훈씨 (37) 등이 있다.
산동성출신인 소봉은 어렸을 때부터 우국화가 종서광씨 (작고) 등으로 부터 정통북?를 배운후 49년 한국에 이주해 왔다. 미술수업을 계속하며 청주대를 졸업한 그는 64년 이후 울산에 자리잡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75년엔 광주의 ?제 허백련옹을 찾아 1년간 사사받기도 했으며 또 남농 허달씨 등 국내 중진화가들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송당은 서울 을지로에서 태어난 화교2세다. 고꾜때부터 본국에 유학, 부창부·소봉남씨 등 중진화가들의 지도를 받은 후 다시 나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듈 화교예술가들은 본국에서 배워온 중국적인 것에 한국적 특징을 가미시키면서 각자 독륵한 세계를 쌓아가고 있다. 「쯔앙꾸에이」로만 상징돼온 화교중에서 이런 예술가들을 비롯한 다방면의 인재가 차차 배출돼 한국사화에서 조그만 한몫을 하게 된 것은 흐뭇한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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