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슈미트」는 멋적게 웃고 머리를 긁적이며 옆방으로 가서 다른 의자를 가지다가 다지 회의를 진행했다.
동양인들의 생각엔 기상천의의「별일」에 속하지만 그들 사이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아주 자연스런 한 토막의 웃음거리밖에 안되는 작은 일이다.

<수상이 주저앉아도 웃기만>
개인주의에 빠진 서구사람들은 계약사항 이외의 일에는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경제부흥과 함께 싹트기 시작한 개인주의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절정 -.
한마디로 장관을 위해 가방을 들어주는 비서, 고용자에 앞서 방문 앞에서 기다리는 피고용자가 없는 사회다.
「슈미트」수상부인 「로키」여사가 엄청난 무게의 식물채집기구를 들고 산속에서 해맸을때도 경호원들은「카메라」하나 들어주지 않았고 복권왕「헤르만·노이베르게」가 말 안장을 들고 쩔쩔 매면 비서들은 오히려 쾌재를 부르는 입장이다.
이처럼 명백해진 개인주의는 가정 내부에서 더욱 심각하다.
장관의 아버지가 양로원에 있다든가, 아들이 만18세가 되자 집에서 그를 쫓아냈다는 어느 부호의 이야기는 이미 옛말에 속한다.
이제는 핵가족까지 재 핵분열을 일으켜 개인단위 가장까지 등장한다. 백년해로가 아닌 「동반자」로서 결합된 부부이고 보면「같이」산다해도 「따로」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부간의 재산관념에 관한 변화는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다.
「뒤셀도르프」에 사는「프라어데·한」(27)이라는 부인은 철저한 전위파 주부I.
63년형의 고물「폴크스바겐」자동차와 TV만이 남편소유이며 나머지는 자기의 것이기 때문에 이혼할 때 이러쿵저러쿵 싸울 필요가 없다는 자랑이다.

<이혼때 싸울 필요 없어 좋다>
50대의 어느 아버지가 나이 어린 아들의 담배를 말리다 못해 따귀를 한차례 때렸다.
그러면 아들이 서슴없이 아버지를 고발하는가 하면 경찰 또한 서슴지 않고 아버지에게 1백「마르크」(약2만6천원)의 벌금형을 내릴 수 있는 사회풍조가 되어있다.
이렇듯 각 가정은 물론 고용자와 피고용자, 나아가서는 교사와 학생사이엔 철저한 개인주의의 강이 흐를 뿐이다.
가장 대표적인 개인주의 집단으로 표현되는 독신자 세계로 갈수록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지금 서독엔 25세이상 45세까지의 독신자가 자그마치 4백여만명.
이 나라 인구의 감소원인이 바로 이들에게 있다고 보면 그 부작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젠 개인주의 앞에 정부마저 두손을 들고 말았다.
「바바라」양이 「슈미트」군과 결혼했다고 할 때 신부의 성씨를 「슈미트」여사로 부르던 것이 여지껏의 관례-. 하지만 정부스스로 「바바라」「슈미튼 「슈미트-바바라」「바바라-슈미트」등 4가지 이름 중 택일토록 가족법을 개정했다. 이러니 개인주의 사상은 날로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나치전체주의에 워낙 혼나>
「유럽」의 개인주의는 서독뿐 아니라 북으로「노르웨이」에서부터 남으로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유럽」사회의 오늘을 대변하는 커다란 흐름이다.
개인주의의 근원은 보는 사람마다 견해를 달리한다.
물론 산업사회의 부산물로 해석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유럽」인의 사상에 개인주의가 깔려있었다는 주장도 납득할만한 이론이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가족 또는 부부중심으로 전개되는 「유럽」신화의 생성과정에서 개인주의의 바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며 독일고대문학에 나오는 「지크프리트」신화의 부부얘기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든다.
거꾸로 설명하면 건국이념이나 권선징악을 신화의 줄거리로 삼는 다른 대륙에선 개인주의가 크게 발전필수 없다는 반대개념인것이다.
그리고 「히틀러」와 「뭇솔리니」가 개인주의를 탄생시켰다는 주장도 흥미릅다.
말하자면 「히틀러」와 「뭇솔리니」의 전체주의에 염증을 느낀「유럽」사람들이 이번엔 개인주의를 철저히 발전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식층이라면 누구나 개인주의의 장래를 우려한다. 집총을 거부하는 군인, 일자리가 얼마든지 있음에도 보험금으로 빈둥빈둥 놀고사는 가짜 실업자등 개인주의의 독버섯에 대한 규탄의 소리가 날로 드높다.

<빈둥빈둥 노는 위장실업자>
77년 가을의「한스·마르틴·슐라이어」사건은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선명하게 설명한 하나의 획기적인 예. 당시 서독경제연합회 회장인 「슐라이어」를 납치한 「테러」범들이 거액의 돈을 요구하자 정부는 「슐라이어」개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테러」를 뿌리뽑으려 했다.
개인주의에 이끌려 전체 즉 다수가 계속 무질서와 혼란을 감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개인주의에 대한 제동이요, 전체 우선의 본보기였지만 「그것이 또한 민주주의」라고 설명한 사람도 있었다.
『철저한 개인주의만이 최선의 사회봉사자』라고 부르짖은 「엘리어트」의 개인주의 예찬론이 지금 서독과 전 「유럽」에서 서서히 비만 받기 시작한 것이다. <끝>【본=이근양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