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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사회주의와 해방신학|전통적인 현실참여는 합법·평화적|「도산」의 이념에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론|해방신학은 기독사회주의보다도 한발내친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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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른바 YH무역여공사건, 그것으로 빚어진 정치사회의 경색상태, 그리고 「도시산업선교회」의 현실참여를 놓고 온 세상의 관심이 여기에 쏠리고 있다.
우리는 이 계제에 노조-노동운동-사회운동-정치운동의 문제를 역사적인 선례에서 그 성격을 알아보고 동시에 기독교의 현실참여에 관한 전형을 기독교사회주의의 사례와 「도산」 과의 관련에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본래의 노동운동이란 과연 어떤것이었던가.
노동운동의 효시가 맨 먼저 산업자본을 확립한 1840년대 영국의「차티스트」운동이었고, 그것이 노조활동의 안정성을 법률로써 보장받기에 이른 1871년의 노조법입법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에비해 산업자본화과정이 상대적으로 늦어진 독·불 등「유럽」대륙제국의 노동운동이 뒤늦게 과격한 형태를 띠었던 것도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한편 한국의 현황은 산업자본의 초기형성단계에 있고 아직도 방대한 농민계층을 포용하면서 가내공업적·중소상공업적인 산업구조와 전근대적 생산양식이 빚어내는 재문제때문에 노동운동의 양상은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 있다.
「도산」 문제같은 것은 이처럼 정립되지 못한 산업조직과 여기서부터 배태된 각종 어려운 사회문제를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은데서 비룻된 것이다.
서구사회에 있어 노동문제와 관련된 기독교사회주의적 이념이 등장하게된 배경도 거기에 있다.
사실, 초기 기독도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란 서구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파생한 사회문제 내지 경제체제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이 형태화한 것이었다. 「브리태니커」는 이렇 정의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회주의적 제원리를 사회현상에 기본적·구조적으로 적용하려고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이론 내지 운동』-. 당연히 사상의 초기발전은 주로 영국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에 주도되어 영리와 경쟁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공격하고 생산자 및 소비자의 협동조합운동의 제창에서부터 온건한 사회입법을 추진하는 점진적이고도 자연적인 발전과정을 거쳐왔다.
1850년대 『하나님 나라의 참다운 권위는 산업과 상업의 영역에까지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소설가 겸 목사인「찰즈·킹즐리」에서부터 1906년의「앵글리컨·처치·소셜리스트·리그」, 그리고 l941년의 「말번선언」에 이르는 거의 1세기에 거쳐 꾸준한 이념적 발전울 이룩해온 것이다. 기독교사회주의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정통자본주의보다도 더 증오하는 반동사상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발전한 영국의 기독교사회주의는 산업사회에있어서의 약자인 노동대중을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적 복음의 논리적 귀결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영국에서 발전한 이같은 기독교사회주의의 입장은 비단 기독교의 교리해석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벤텀」·「밀」등으로 대표되는 영국적 공리주의의 전통, 즉 「최 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사회이념의 주지로 삼았던 영국의 지적 전통이 공통적으로 그 바닥에 깔려있을 뿐 아니라, 후일 「래스키」·「토니」등이 표방했던 이른바 사회화의 이념도 그런 전통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개혁의 지향이 한결같이 합법주의·의회주의였고, 경제 발전도 따라서 점진적·자연적인 사회 개량의 결과라고 본 점을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오늘의 자유사회에서는 비록 자본주의사회라 하더라도 그안에서 근대초기의「이념형」 으로 삼았던 완전 자유경쟁체제, 사유재산의 완전한 불가침, 완전한 시장경제질서 등을 그대로 인정하고있는 예는 없다.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어떤 나라도 공공성이 강한 산업·기간산업 등은 국유 내지 공유화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고 특히 임금소독층을 위한 사회입법이 보편화돼있다. 또 근로자의 평생적 생활보장을 위한 사회보험제도의 확립도 공통적 추세다.
한편 자본소득층에 대한 중과세, 재정정책을 통한 소득이전, 경제입법을 통한 독과점의 규제등을 통해 사회적 형평을 계속 추구하는것도 예외일수 가 없다.
한국의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도 이제「도산」이 판련된 것으로 보도된 이른바 YH무역여공사건이 사회적·정치적 문제로까지 크게 확대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이른바 「도산」 의 이념 또는 그 실현 방법에 관한 내용은 불원간 그 전모가 밝혀질 것이다.
다만 부분적으로 알려진 「도산」의 이념이나 실천강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기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첫째, 「도산」의 이념과 기성체제와의 관계가 어떤것인가.
만약에 「도산」의 선교 활동이 현존 경제체계나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사회입법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본질적인 벽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근로계층의 권익옹호를 위한 「의식화」 방법, 즉 그들의 자각을 촉구하는 방법이 설득적 선교의 수준을 넘어 폭력적이거나 파괴적인 수단도 불사하라고 선동하고있다는데 대한 의문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현존 법체계와의 관계는 차치하고서라도 종교와 사회운동 내지 정치운동 일반과의 한계라는 미묘한 문제에 봉착하지 않겠는가.
듣건대는 기독교교직자 내부안에서도 이른바 「해방신학」에 관한 시비양논이 있다는 것이다. 이 해방신학과 「도산」의 기독교사회주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뭣인가 분명한 해명이 있어야 이 물음에 대답이 나올것이다.
「도산」의 활동의 정당성을 놓고 우선 기독교계 안에서 찬반시비가 일고 있다.
일반 사회사상과 같은 현실적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인간본성의 내세적 영혼을 구원하며 현실에서의 정신적 지고선을 지향하는게 종교의 본질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측에서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반대한다.
더구나 종교가 노사문제 같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이해가 얽힌 일에 뛰어드는 것은 종교의 본질을 망각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 「도산」측은 『교회 선교란 현실을 이해하고 소화하는데서 선교사명을 찾아야한다』는「한스·마존」 의 선교신학 이론을 내세운다.
그러나「도산」이 기독교의 덕목인 「사랑」을 유독 근로자의 편에만 치우쳐 베풀려는 행태는 본래의 기독교적 사람을 계급주의적인 사랑으로 속화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반론이다.
교회의 속세적인 「현실참여」는 개인의 현실적 고뇌를 선교활동으로 치유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종교가 금기하는 「현실기복」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신학적 측면에서는 성서의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한다. 「도산」측이 「누가복음」 4장 18절의 성구를 인용, 기독교의 기본정신이 『가난한자를 돕는데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반론이 나온다.
본래 이 성구는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라는 전제가 귀절 앞에 있어 귀절속의「가난」은 물질적이거나 생리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영적인 내용이라는 주장이다.
「도산」의 신학에 반대하는 신학은 이 성구가 도산측의 해석대로라면『기독교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모든 사람의 정신을 바로잡는 종교가 아니라 가난한자에게 돈버는 방법이나 경세술을 가르치는 돈벌이 연구학이냐』고 몰아붙이기도 한다.
또 도시산업선교가 흔히 정치신학이라고 비판받는 WCC등의 노선에 따라· 순수한 인간구원의 복음전도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물질적인 생활의 향상만을 적극 추구하는 노동운동이나 빈민 의식을 선동한다면 자칫 정치활동화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비해「필드·워크」방법의 선교를 통해 기독신앙을 고취하겠다는 산업선교의 입장은 대체로 은유적인 성서해석을 현대인류의 의식구조에 조명해 현세적으로 이해하려한다.
반「도산」 측은 심지어 도시산업선교의 노동운동이 산업평화와 노동윤리의 창조라는 미명을 내걸고 유물론적인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선동한다고 비판한다.
이와같은 신학상의 또는 교회내의 시비에 관해서 우리는 깊이 개입하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기독교사회주의적인 입각점에서 기독교가 산업사회에 현실적으로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념은 점진적인 개혁에 있었고 그 방법은 평화적·입법적인데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일반사적으로 지적하고자 한다. 해방신학의 이념과 실천을 우리가 소상히 알고자 하는 소이는 바로 이와같은 일반적 이해와 어떠한 거리가 있느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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