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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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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안동권씨 문중에서는 소위 「사시」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네가지를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족보다. 이를 뒷받침하듯 1476년에 간행됐다는 「안동권씨족보 성화병신보」가 최근 「하버드」대의 「와그너」교수에 의해 공개됐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라던 문화류씨 가정보보다 86년이나 앞선 것이다. 하기야 가정보보다 1백40년전에 이미 문화류씨보가 있었다고 동보 서문에는 적혀있다.
그러나 그게 인쇄본인지 단순한 필사본인지는 알길이 없다. 도시 우리나라족보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신라시대 궁복이란 자가 당에 가보니 모두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의 제일 흔한 장씨와 궁을 합쳐 자기도 장가라 하고 이름을 보부라 바꿨다. 그 당시엔 족보가 있을턱이 없었다.
왕건을 추대한 고려의 개국공신중에 홍유란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도 처음엔 성이 없었다.
부몰홍씨의 시조가 된 것은 그후의 얘기였다.
그러나 고려문종때부터는 성씨가 없으면 과거를 칠수 없었다. 그러니까 족보가 있었다면 고려 말렵부터였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요새와 같은 족보가 아니라 단순한 가첩이나 가승정도였을 것이다.
족보가 유행한 것은 임진란을 겪은다음 숙종때부터 였을 것이다. 이때엔 족보가 없으면 양반도 상민으로 전락되고 군역을 치르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상민들은 호적을 위조하기도 하고 뇌물로 남의 집안 족보속에 슬쩍 끼어 들기도 했다.
이래저래 족보는 시대와 함께 부피가 늘어났다. 본관하나에 파가 여럿씩 갈라지고 이와함께 족보를 따로따로 갖게 된 까닭도 짐작할만한다.
새로 공개된 안동권씨 족보에 보면 친손과 외손이 동등하게 다뤄져있고, 아들·딸의 차별도 없다.
그렇다고 조선초기에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대접을 받았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후의 변화를 유교사상의 영향탓으로만 돌리기도 어렵다.
어쨌든 족보에 대한 관심은 중기이후 붕당파벌의 싸움이 치열해지면서부터 더욱 깊어갔다.
일제때에는 족보도 출판물중에서 늘 「베스트셀러」의 제1위였다. 그 까닭은 또 다른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족보에 대한 관심은 미국사람에게도 많다. 「앨릭스·헤일리」는 「루츠」를 쓰기위해 「워싱턴」의 고문서도서관도 찾았다. 「솔트·레이크」시의 족보 비문도서관도 찾았다.
여기에는 「마이크러」열람대만도 3백대나 된다. 족보를 보려고 매일 평균 3백~4백명이 들어온다니 그럴만도 할 것이다.
요새 우리 나라에서는 족보를 거들떠보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특히 젊은세대사이에서.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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