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식을 즐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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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 성북구 동선동5가 김귀연 씨(44·창문여중 교장) 댁은 여름휴가철 세상을 들뜨게 하는 「바캉스」 열풍과는 관계없이 철저히 집안에서의 피서를 즐기는 실속파 가정이다. 『요즘 말하는 「바캉스」라는 것을 가본지 10여 년이 넘습니다. 뭐, 특별히 그것을 기괴해온 것은 아니고 연로하신 어른들을 모시고 살다보니 갈 기회가 없었다는 얘기가 맞겠지요.』 또 6년 전부터는 집안 어른들의 상이 계속 겹쳐 한 여름에도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준비하다 보니 여름을 집안에서 보내는 것이 가풍처럼 돼 버렸다는 김씨의 설명이다.
『말하자면 타의가 많이 작용했지만 10여 년간 집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피서법이 그 어느 것보다도 마음에 들어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부인 이명자 씨(39)와 선일(14)·성일(l2)·순일(11)·정일(10) 등 고만고만한 나이의 연년생 자녀들도 아버지의 뜻에 이의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무래도 물가에 가고싶어 하기 때문에 마당 한구석에 지름2m정도의 조그만 고무 「풀」을 놓고 아주 더운 한낮에는 그 안에 들락거리거나 저희들끼리 물장난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는 한편 「바캉스」갈 비용으로 영양가 있는 간식을 듬뿍 만들어 아이들의 건강관리에 힘쓴다. 이 댁에는 70세가 되신 할머니가 계셔서 혀끝만 잠깐 즐겁게 해주는 현대식 음식과는 근본적으로 맛이 다른 재래의 고유음식을 직접 만드는 일이 많다.
자주 만드는 음식은 냉 콩국수. 흰콩을 삶아서 껍질을 벗겨 「믹서」에 갈고 체에다 밭아서 국물을 낸다. 이 콩국을 많이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두고 수시로 꺼내 그냥 마시기도 하고 점심때는 칼국수를 말아 식사 대용으로 삼는다.
또 편수(만두)도 자주 마련하는 별식 중의 하나이고 찹쌀·보리·콩·깨를 혼합해서 만든 미숫가루는 여름철 내내 착실한 음료수가 되어준다.
『작년에 돌아가신 선친께서는 여름이 되면 대청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모시적삼 차림으로 책을 읽다가 무더운 한낮이 되면 목침을 베고 낮잠을 주무시곤 하셨는데, 늘 하시는 말씀이 「덥다고 생각하지 말고 책에 몰입하다보면 어느새 더위를 잊게 된다」는 것이었다』고 김씨는 회상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꼭 책을 읽게 하고 저녁에는 마루에 모여 앉아 읽은 얘기를 들어주면서 아버지로서의 조언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댁의 피서 「프로그램」은 사람 많은 곳을 찾아가서 겪어야하는 몸 고생, 마음고생 대신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과 독서로 심신의 영양을 섭취하는 것인 셈이다.
『선풍기·「에어컨」도 없고 「바캉스」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옛날에는 대청마루에서 보내는 피서법이 아주 평범한 것이었겠지만 생활에 쫓기면서 여유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귀하고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년에 며칠간 주어지는 황금 같은 휴가가 되면 밖에서 무엇인지 찾아보려고 애쓰는 요즘의 「바캉스」풍토를 김씨는 이렇게 진단했다. <이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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