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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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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허허로운 진실로 시를 썼을 때, 결코 긴장이 풀린 상태가 아닌 단순성과 만나게 되고 그 단순성이야말로 힘찬 감동을 공유케 한다고 생각했다』고 이시대의 유능한 몇몇 젊은 시인들은 (「반시」4집서문)말한다. <긴강이 풀린 상태가 아닌 단순성>이란 실로 엄청난 이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제대로 조준되어야할 이상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상이라는 이유로해서 그것에의 획득·노력이 미리 포기될수는 없는 것이다. 이 단순한 논리를 이들 젊은 시인들과 더불어 다시 강조하고 싶은 까닭은, 온갖 괴팩한 형식논리들이 생명의 통제를 잃고 멋대로 엇갈리는 우리의 현실이 우선 시인들에 의해서라도 제대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어쩌면 현실로부터의 평자의 강박관념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논리와 지혜와 용기가 모무 절제된 사회에서 받는 두가지의 압력은, 첫째 바로 그런 현실 자체이며, 둘째 그것에 기계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정서구조의 상무형이다. 이 두가지는 어느 것이 어느 것을 선결할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를 슬프게 한다. 『반시』에서 정호승이『살아갈수륵 잠마저 오지 않는 그대에게/평등의 눈물올 보여주면서/슬픔으로 슬픔을잊게 한 것이니』 하고 말할 때, 우리가 체념의 정서에 다시 젖는 것이 아니라, 자그나마 삶 자체의 엄숙한 의미를 환기하게 되는것은 그때문일듯 하다.『슬픔많은 이 세상도』 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말고/부질없이 봄밤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슬픔많은 이 세상도 살아 보아라/슬픔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슬픔많은 이 세상은 아름다와라.』 삶 자체의 위협마저 느끼는 양심의 소리는 같은 지면에 실린 이종욱의 「나는 살아 있구나』 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때묻은 앞치마에 닦은손으로/식은 밥과 몇점 고기담아/말아주는 국밥 한그릇 먹으면서/나는 살아있구나』 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역시 이들과 같은 동인인 김창완의 경우에 있어서는 『줄 수 없다 어떤 경계도 부숴라/두드리면 무너지던 힘없는 벽처럼/사내의 한 삶도 무너져 이룬 페허에/콧물로 풍선 만들며 소년은 존다』 (어떤풍경)와 같은 표현을 통해 폐허에 이룬 삶의 풍경이 반영된다.
젊은 시인들에게 있어서 이토록 삶이 폐허로 인식되는 것은 그것이 가상의 삶이며, 허위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허위의 의식, 흑은 정서 (정호승) ,허위의 부(이종욱). 허위의 문명(김창완)을 통해 어렵지않게 확인할수 있다.
말하자면 삶의 여러 가지 그럴싸한 풍경이 다만 그렇게만 보일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인식에 날카로운 눈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들 시인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할것인가를 묻는 것은 현명치 않다. 허위는 허위로 드러남으로써 족하다. 그 다음에 남는것은 짙은 연민이다.「이씨여. 내리는동안 서로얼굴 비벼대도 떨어저선/파도에 묻혀 흔적없는 우리도 눈이겠거니/땅에 쌓이는 것도 곧 녹아 저렇게 눈물이 되는 구나』 (김명인 『이씨의눈』 ) 라든가,『산으로나갔던/무명씨,무명씨/네말들이 남긴 첩첩한것들이/이슬되어 땅에 떨어진다』 (박해수 『무명씨』-「현대문학」8월호)와같은 표현은 조금 눅눅한 연민의 세계요, 보다 투박한 직접성을 노출한 정의홍의세계 (『한반도2』 -「현대문학」8월호)도 있다.
나는 김명인 김창완 권지숙동 이들 5명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인간. 혹은 윤리와 격리되어있는 이 시대 삶의 참담한 모습을 읽는다.
어떤 시인들에 있어서는 그것을 다만 기계적으로 고발하는 것조차 쓸쓸한 슬픔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젊은시인들이 우리시대의 생각하며 사는 어떤 사람들의 생각보다도 앞서가기 시작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인간 혹은 윤리가 결여된 정치, 그리고 경제의 메마른 도식의 늪에도 이런시인들의 서늘한 생명의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박해수가 적고 있듯이 오늘 우리의 삶이 <이슬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만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나도 적시고 남도 적시는 패연한 물줄기로 양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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