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심서현 기자의 아부다비 겉핥기 (4) 메이드 잔혹사 vs 한국엄마 잔혹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쇼핑몰에서 잠시 휴식 중인 메이드와 사모님. 메이드는 대개 파스텔톤의 옷을 입어 검은 옷 차림의 주인집 여성과 확연히 구별된다.

아부다비에 온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다. 공원에서 지인들과 바비큐를 즐기는 중이었다. 한쪽에서 아들 기저귀 가는 나를 곁눈질하던 아랍 꼬마가 불쑥 물었다. "얘 니 아기야?" 나는 '별 싱거운 질문?' 싶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살이나 됐을까 싶은 그 여자애는 유모차와 나를 위 아래로 훑더니 재차 물었다. "네 아기라고?"

지금은 그 애의 궁금증이 이렇게 해석된다. "(같은 동양인이긴 한데..) 얘 니 아기야 (아니겠지)?" 나 "끄덕" "(남들 놀 때 애 뒤치다꺼리 하는데 메이드가 아니고) 네 아기라고?"

쇼핑몰이나 식당에서 보채는 애를 달래거나 이유식 숟가락을 들고 씨름하고 있다면 아이 엄마보다는 메이드일 확률이 높다. 이곳은 이를테면 '메이드의 나라'다. (가정부나 가사도우미로 번역해야겠지만 어감이 살지 않아 그냥 메이드라고 하겠다.) 로컬(현지인을 가리키는 말) 가정은 다들 메이드를 한 명 이상 쓴다. 자녀를 많이 낳고 손님 접대도 잦아 가사가 많아서이기도 하고, 메이드 임금이 워낙 싸서 그렇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쿠웨이트 같은 걸프협력회의(GCC) 부자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UAE에 메이드 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국적은 필리핀, 인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6개국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CCTV를 각 방마다 설치한 어린이집의 모습. 엄마들은 스마트폰이나 PC로 아이들을 확인할 수 있다.

눈부신 순백 앞치마에 프릴 달린 머리수건을 쓴 서양식 메이드라든지,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 나오는 전도연의 자태를 떠올려서는 곤란하다. 치렁한 검은 아바야(긴 외투) 위로 샤넬백을 메고 매장 안을 여유로이 구경하는 로컬 사모님의 한 발짝 뒤에서 베이지나 분홍, 연초록 같은 파스텔톤 상하의를 입고 유모차를 끌고 있는 아시안이나 아프리칸 여성들. 중동 부국에서 그들의 삶은 '걸프만 드림'보다는 '메이드 잔혹사'에 가깝다.

공무원 월급이 천만원 이상인 나라지만 메이드 임금은 좀 서글플 정도로 싸다. 로컬 가정의 입주 메이드가 보통 월 20만~40만원을 받는다. 주인집에서 메이드 비자와 의료보험 해주고 왕복 비행기 삯 지불하고 손바닥만한 '메이드룸'을 내어주는 대가다.

낮은 임금보다 심각한 것은 학대다. 맞아 죽고 굶어 죽는 메이드 범죄는 심심찮게 현지 언론에 보도된다. 몽둥이로 자주 때리고 굶겨 에티오피아 메이드를 죽게 만든 이마리티 경찰관 부부는 지난달 아내 징역 15년, 남편 3년이 확정됐다. 사망 당시 메이드의 몸무게는 38kg이었다. 나체 사진을 찍고 락스를 먹이고 다락에 가두고.. 모든 종류의 학대가 행해졌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학대받은 메이드가 주인집 아이를 공격하는 거다. 지난달 두바이에서 에티오피아 메이드가 이마라티 교사 가정의 10대 자녀 셋에게 뜨거운 물을 붓고 칼로 찔렀다. 애들은 욕실로 도망가 목숨을 건졌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 메이드는 자살을 시도했다. 주인 부부는 "메이드에게 잘해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월급은 미뤘다가 3개월치를 몰아서 주고 약속된 연 1회 귀국 휴가는 박탈한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집에 보내달라"했다가 주인에게서 "네 여권 없어졌다"는 말을 들은 며칠 뒤 여자는 범행을 저질렀다. 검찰은 메이드에게 살인미수죄로 사형을 구형했다.

메이드를 해친 주인이 사형 선고를 받는 일은 거의 없다. 피해자 유족이 위자료인 '블러드 머니'를 받기로 하면 가해자는 사형 선고를 면할 수 있어서다. 블러드머니는 통상 20만디르함(약 6000만원)이다. 이마라티에겐 3~6개월치 월급 정도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메이드의 유족에겐 인생이 바뀌는 돈이다. 메이드의 유족은 대개 이를 받는다. 반대의 경우는 받으려 하지도 않거니와, 저 돈을 낼 수 있는 메이드도 없다. 주인집 애들을 공격한 메이드의 월급은 500디르함(약 15만원)이었다.

UAE 정부는 "고용주와 메이드 양쪽의 권리를 다 보호하겠다"며 지난 달 초 '메이드 표준계약서'를 발표했다. 메이드 학대와 도주가 사회문제가 되고, 인력업체의 메이드 중개비가 점점 올라 자국민들의 불만도 커졌기 때문이다. 핵심은 이제까지 메이드 파견국 대사관이 해왔던 노동계약의 인증감독 업무를 UAE 내무부가 직접 맡겠다는 거다. 여기에 메이드에게 일주일에 하루 휴무, 연 14일의 유급휴가와 최대 30일의 병가를 주는 내용도 넣었다. 그전까지는 주7일 일 시키는 집도 수두룩했던 거다.

그런데 반발이 먼저 나왔다. UAE 노동법에는 최저임금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메이드들의 나라가 자국민이 UAE에서 받아야하는 임금 하한선을 정했고 대사관이 각각의 계약을 감독, 승인해왔다. 그런데 UAE 내무부가 메이드 계약 감독을 직접 주관하면서 "내가 총대 멜 테니 넌 감독 안 해도 돼"라고 나온 거다. 그렇다면 각국의 최저임금도 지켜지지 않는다. 이 발표 후 필리핀 정부는 "우리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자국민 메이드의 UAE행을 중단시킨 상태다. UAE 내 필리핀 메이드는 약 12만5000명. 메이드 노동시장은 인력 수급에 차질이 올까 바짝 긴장해 있다.

한국인이 '정'의 민족이라면 이마라티(UAE 국민)의 키워드는 '관대함'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직접 나서서 메이드와 고용인 모두의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UAE 정부의 입장은 이해되는 구석이 있다. 실제로 이들은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풀며, 그런 문화를 자랑스러워한다. 그 연장선에서 메이드에게 잘해주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뒤집으면 이렇다. 이 나라에서 이방인들은 이마라티의 호의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한국에선 이 영화 대사가 먹혔다. 아부다비에서 절감하는 건 vice versa, 그 역이다. 내가 만난 이마라티들은 모두 친절하고 베풀기좋아하는 호인들이었다. 하지만 호의가 없이도 지속되는 것만이 권리다. 누군가의 호의가 첨가돼야만 내 것이 된다면 그건 이미 '권리'가 아닌 거다. 지금 메이드에게 필요한 건 너그러운 주인을 만나는 행운이 아니라 주인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제 손에 틀어쥔 권리다.

자, 이제 한국 엄마 입장으로 돌아와보자. 솔직히 진짜 적응 안 된다. 월 200만원으로도 괜찮은 조선족 도우미 이모님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초반 몇년간은 내 월급은 애 돌봄 비용으로 다 들어 가도 버텨야 한다고, 직장맘 선배들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다. 전업맘은 쉽나. 애가 넷인 아는 언니는 애들 어린이집 원장부터 보육교사까지 머릿수대로 챙겨야 해서, 스승의 날이니 구정이니 추석이니 소풍이니 온갖 '날'이 돌아오는 게 겁난다고 했다. 혹여 내 자식 엉덩이라도 꼬집힐까. '을 아래 병, 정'으로 알아서 기는 게 한국 엄마다. 그런데 월 30만원에, 그것도 온갖 갑질 하면서 육아노동을 남에게 넘긴다고?

어느 더운 날,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냉커피를 사서 아들을 봐주는 어린이집 보육교사에게 건넸다. "왜 나한테..?" 그 필리핀 여자는 진정 의아해했다. 한국에서 일하고 싶었다던 옆반 필리핀 교사는 조금 친해진 뒤 내게 자주 농담했다. "한국 돌아갈 때 나 데려가는 거 잊으면 안돼!" 그는 월급 1000디르함(약 30만원)을 받는다 했다. 노동 인권이고 자시고, 내 소시민적 자아는 솔직히 그 순간 이 나라 엄마들을 부러워했다.

곧 복직하면 친정엄마의 남은 기력을 착취해 아들을 떠넘겨야 할 터. 심난한 마음에 접속한 서울시 보육포털, 몇달 전 신청해놓은 친정 곁 구립 어린이집 대기순번을 확인하니 여전히 세자릿수다. 103번.
개콘의 새 코너 '렛잇비' 멜로디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나라에서 무상보육 내 얘 돌봐준대요~
맞벌이 순위는 2위죠~
103번~103번~ 103번~103번~
우리 아들 앞에 102명~ 우

심서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