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와 OPEC<석유수출국기구>)><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메이저」7자매중 「걸프」, 「소칼」과 「텍사코」의 합작 해외판매회사인「칼덱스」, 그리고「메이저」축에 끼지는 못하지만 미국의 대석유회사인「유니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
이들 회사는 흔히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공헌자로 칭찬도 듣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격적인 이윤확보로 비난도 받는다.
우리나라 정유산업의 효시는 1935년6월 일제가 원산포에 세운 조선석유주식회사. 이회사는 연간 정유능력 40만t의 소규모로 44년까지 가동되다가 전략상의 이유로 울산지방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워 공사중 해방을 맞았다.
그후 미군정관리로 들어갔다가 6.25때는「유엔」군의 유류보급창으로 징발됐고, 휴전후에는 자유당정부가 외국석유회사를 끌어들여 가동하려했으나 어느 회사도 구멍뚫린 나라에 투자하려 하지않았다.

<외환파동으로 해를 넘겨>
그러다가 5.16을 맞았고 혁명정부는 62년1월 유류동력원의 국내확보와 외화절약, 나아가 기간산업을 육성한다는 취지에서 외화1억6천만「달러」와 내자3억5천만원을 들여 울산에 하루 원유처리능력 3만5천「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해4월 미국UPO사(유니버설·오일·프로덕츠)와 계약을 맺고 정유공장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10월에는 대한석유공사를 세웠다.
그러나 이 공사도 때마침 들이닥친 외환파동으로「달러」가 바닥나는 바람에 해를 넘기고 지지부진 절망상태에 빠졌다.
한국상륙1호「메이저」인「걸프」는 바로 이때 들어왔다.
당시 이 고비를 넘기기위해 정부는 당초 1백% 국영기업체로 하기로 했던 유공을 합작회사로 하는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유공으로 하여금 합작선을 탐색하도록 했다.
이 합작교섭에는「걸프」이외에도 「모빌」「에소」(지금의「엑슨」)「셀」등 5개「메이저」가 관심을 보였으나▲원유공급가격이 가장 낮고▲2천5백만「달러」한도안에서 유공주식 25%를 인수하며▲나머지는 장기차관으로 제공하고▲10년동안 기술자를 무료로 훈련시킨다는 조건을 제시한「걸프」에 낙착됐다.
당시 이교섭을 추진한 유공의 한고위간부는「모빌」에도, 「에소」에도 연신 굽실거리며「조인트·벤처」를 「사정」했으나 저쪽 사람들은 한국의 외환사정만 따져물었다고 회고했다.

<7년뒤엔 「유공」을 인수>
이처럼「걸프」는 「메이저」답지않게 상륙했다. 대부분의「메이저」가 산유국, 또는 후진국에 적극정세로「침투」한데 반해 「걸프」는 우리에 의해 모셔졌다. 물론「걸프」의 계산이 다른 자매들보다 빨랐던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그야말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걸프」는 출자에 대한 반대급부로 유공은 반드시「걸프」가 공급하는 원유만 써야하며 원유수송도 「걸프」유조선을 이용해야 한다는 「원유공급계약」과 「부선계약」외에「분배및 판매계약」「일반석유제품공급계약」을 맺어 원유 도입에서 수입석유공급에 이르기까지 거의 독점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외환이 고갈된 상태에서 이만한 양보는 불가피한 것이며「걸프」의 한국진출은 경제발전의 계기가 됐고 미군1개사단의 주둔과 맞먹는 것으로 평가됐다.
「걸프」는 이로부터 7년뒤인 70년 유공주식의 25%를 추가 증자하면서 5천만「달러」를 더 내고 유공의 운영권까지 인수, 유사이래 처음으로 국영기업체가 외국인 손으로 넘어갔다.
당시도 정부는「나프타」분해공장설립을 위해 외자를 구하려했으나 뜻대로 안돼「걸프」의 출자조건으로「걸프」가 투자한 자본의 1백50%를 자국에 송금할 때까지 운영권을 넘겨준 것이다. 이것이 뒤늦게까지 말썽을 빚은 유공주식의 2차 인수계약이다.
66년12월에 들어온 「칼텍스」는 「걸프」와는 대조적으로 치열한 경쟁속에 누구도 예기치못한 가운데 사뿐이 상륙했다.
당시의 제2정유쟁탈전은 한마디로「모든 재력과 정치적인 줄을 탄「이전혈투」로 표현된다.
이미「걸프」가 한국에의 투자안전성을 실증하고 연간 수십억원의 순익을 올리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국내 업자와 외국의 석유회사가 배를 맞추고 쟁탈전에 뛰어든 것이다.

<6개월간 싸운 이전혈투>
「롯데」계열의 동방석유는 일본의 「이또오쮸」(이등충), 「럭키」계열의 호남정유는 일본의 「미쓰이」(삼정)와 미국의「소코니·모빌」, 판본계의 삼남석유는 미국의「선」과「콘티넨틀· 오일」, 한국화약계의 동양석유는 일본의「스미또모」(왕우)와 미국의 「스켈리」, 삼양빙산의 삼양개발은 일본의 「니찌멘」(일면)및 영국의 「유니언」, 한양재벌의 한양석유는 미국의 「에소」 를 차관선으로 내세웠다.
제2정유의 실수요자 선정공고는 경제기획원이 이해 5월에 냈으며 선정발표는 11월이었다. 자그마치 6개월동안「권력과 금력을 업은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동안 「소코니·모빌」의 부사장이 미국에서 날아왔고 「에소」의 동경지사장과 「미쓰이」사장이 서울을 오가는등 각회사대표·간부들이 뻔질나게 국내거물들과 접촉을 벌였다.
당시 주무부서인 상공부의 실무자로 있었던 한관계자는 제2정유이야기를 『높은 하늘위를 날아다녔다』고 표현했다. 실무자는 기술정도나 다른 어떤 명목으로도 참여하지못하고 뜬소문만 듣다가 뒤늦게「칼텍스」의 상륙을 알았다는 것이다. 실상「칼텍스」는 「5월공고」때 계획서도 내지않았으며 국내합작회사인 호남정유의 「파트너」도 「칼텍스」가 아닌「미쓰이」와「소코니·모빌」이었다.
이때문에「칼텍스」의 상륙은 그만큼 뒷이야기가 무성하다. 「칼텍스」를 차관선으로 유도한데는 당시의 거물 모씨가 크게 활약했다는 말이 공공연히 퍼졌다.
「칼텍스」보다 오히려 차관선으로 더 유력했던「에소」대표가 모씨와 회담한뒤 크게 화를 내고 보따리를 싸든채 가버렸다는 뒷이야기도 당시 「메이저」들의 얽히고 설킨 상황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유력했딘 석관선도 낙방>
68년4월 5백만「달러」를 들여 한국화성과 합작, 제3정유인 경인「에너지」 건설에 참여한 미국의 「유니언·오일」도 당시 「절묘한 인천상륙작전」으로 통했다.
65만kw짜리 민간화전 일당5만「배럴」규모의 자체연료처리시설은 얼핏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같았으나 당시 재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었다.
정부는 66년의 제2정유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3정유건설을 시사했고, 그 예약권을 공공연히 한양재단의 한양석유에 주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예약권을 바꿔치기해 한양은 물론, 군침을 삼키고 있던 다른 재벌도 경악과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인천을 그렇게도 바라다가 여수로 간 호유의 불만은 대단했다.
이때에도 외자도입심의회 과정에서 거물 모씨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고 그것은 국회에서도 동네 북처럼 심심치않게 터져나오곤 했다.
「메이저」가 가는곳에는 항상 말썽이 따르는 것인가보다. <신종수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