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의 새 평가(상)|사학적 측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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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 나라 최근세사의「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이 회갑을 맞았다. 이제까지 3·1운동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각적인 논의가 전개돼왔으나 이제 하나의 확고한 사관으로서 정립돼야 할 싯점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다. 그 동안의 연구를 되돌아보고 정치사·사회경제사의 측면에서 이 운동을 재평가하는 「시리즈」를 엮는다. 【편집자주】
『3·1운동은 우리 근대사의 서리고 서린 산맥가운데 외연히 솟은 한 고봉. 이 봉우리에 서서 보면 외세의 침노 속에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생성 발전해온 우리민족의 발자취가 멀리 가까이 제자리를 드러내면서 부각된다.
3·1운동은 우리 근대민족운동사의 큰 호수. 이 이전의 모든 근대민족운동의 물줄기가 이리로 흘러들고, 이 이후의 모든 근대민족운동이 여기서 흘러 나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사학자 천관자씨는 3·l운동이 우리 역사속에 차지하는 위치를 이렇게 실감한다. 3·1운동 회갑을 맞는 오늘, 우리역사의 한 분수령과 저수지를 보는 눈은 그 시대를 살던 세대와 얼마만큼이나 접근해있을까.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해방 후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독립운동사를 올바로 보는 시각을 마련한 역사정리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정 대통령으로 추대된 박은직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l920· 상해)가 그 개척적 노작이다. 나라를 잃게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한국통사』로 정리한 그는 나라를 되찾으려는 우리민족의 항쟁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최근에 이현희교수(성신여사대)에 의해 빛을 보게 된 이종일선생의 일기 『묵암비망록』 도 민족대표33인의 1인으로 직접 3·1운동에 참가한 선생이 1898년부터1925년8월까지를 정리한 소중한 자료다. 여기엔 특히 전통사회에서 외면·냉대·소외당했던 계층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구국운동에 참여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3·1운동연구의 1차적 자료들은 적지 않게 수집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 운동사Ⅱ』(1966)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독립운동사Ⅱ·Ⅲ』(1971)등은 광범위한 현지답사를 봉해 당시의 시위상황을 부·군별로 파악, 3·1운동의 전모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개별적인 학자들의 논문은 대략 2백여편을 헤아린다. 그중에도 『삼일운동 50주년기념론집』(동아일보사편·1969)은 각방면의 연구자들이 제각기의 각도에서 3·1운동을 파악한 76편의 논문이 모여 이 방면 연구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후에 나온 윤병석교수의 『삼일운동사』(1975·정음사), 안병직교수의 『삼일운동』(1975·한국일보사), 윤병석·신용하·안병직편 『한국근대사론Ⅱ』(1977· 지식산업사)는 연구경향의 변모를 보여주는 학적성과들이다.
3·1운동을 보는 눈은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최근 들어 이 같은 이견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고있다.▲첫째, 이 운동을 외부의 영향에서 결과한 것으로 볼 수있는가▲둘째, 33인 또는 48인으로 불리는 중앙지도체의 역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지 않은가▲세째, 이 운동에 대한 연구시각에 있어 이 운동을 사회제도 및 사회구조의 산물로 파악해야하지 않는가 하는 견해들이다.
계급사관의 도식론에 따라 3·1운동이 「러시아」혁명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거나 「윌슨」 미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이 기폭제가 되었다거나하는 입장에 대한 반론이 첫번째 범주에 속한다. 우리의 주체적 사관에 선 견해들이며 이는 어느 정도 실증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우리 민중의 일제에 대한 증오감과 울분이 한데 모여 폭발한 저항운동이라는 것이다.
3·1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33인 또는 48인의 민족지도자가 투항적이었다거나 출신성분에 있어 일본 식민정책의 산물인 예속자본계층이 주도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계를 갖고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같은 의견은 3·1운동이후의 안목으로 또 민족대표의 대부분이 친일로 돌아선다는 결과를 두고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이견에 맞부딪친다.
이 같은 3·1운동 옹호론은 중앙지도체가 운동에 점화작용을 한자체로 평가될 수 있지 않는가고 보는 것이다.
한편 3·1운동을 민중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이를 「부르좌」혁명이라고만 볼 수 있는가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것은 민중의 상당부분이 고종의 장례일에 구왕조에 대한 연련의 감정에 머물러 있었을 뿐 근대지향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는데 근거한다.
그러나 3·1운동은 조선말기의 민난·동학난·의병운동·독립협회·애국계몽운동에 밀접히 연결된 역사적운동이고 3·1운동의 주도세력을 사회계층적으로 볼 때 처음에는 하층중간계급출신의 지식인에 의해 평화적으로 이끌려졌으나 점차 지방운동으로 확산되고 폭력화됨에 따라 민족지도자중심의 독립운동에서 소농민·소상인·지식인·수공업자·노동자가 중심이 된 대중으로 전개되었다는 실증적 연구가 나와있다(김영모·『3·1운동의 사회계응분석』).
결국 3·1운동의 사회적 성격을▲시민혁명이었고▲지식인 혁명이었으며▲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응결된 반침략·반봉건의 자주독립운동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같은 이견들은 물론 실증연구에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는 당시의 세대가 이 운동에 대해 갖는 느낌이 학자들의 연구결과와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방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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