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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칼럼] 여당 초선들과 ‘침묵의 나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80호 30면

여당의 문창극 총리 후보 사퇴론의 도화선이 된 새누리당 초선 의원들의 성명(6월 12일)이 나온 과정을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성명을 주도한 김상민 의원부터 사퇴론의 발단이 된 문 후보의 2011년 온누리교회 강연 동영상이나 전문을 보지 않은 채 성명을 작성했다. 또 다른 의원도 강연 전문을 보지 않고 성명에 참여했다가 “성명 내용이 내 뜻과 다르다”며 철회하고 말았다.

김 의원은 “강연 전문은 읽어보고 성명을 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전문을 본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성명을 냈다”고 주장했다. 성명에 참여한 또 다른 의원에게도 “전문을 다 보고 성명에 참여한 거냐”고 물었다. 가타부타 답변을 하지 않던 그는 “전문을 보고 안 보고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문 후보의 강연 전체를 다 보고 나서도 그의 역사관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전체를 다 보고 나니 그런 비판적 인식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공인의 진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려면 치열한 검증과 확인 절차를 거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그들은 문 후보의 연설 중 극히 일부를 편집한 KBS뉴스와 ‘전문을 봤다는 몇몇 사람들’의 얘기만을 바탕으로 “역사관에 문제가 많다”고 못박고 사퇴를 요구했다. 이는 그들의 성명서 전문을 읽지도 않고 “문 후보자 비판은 종북좌파나 하는 짓”이라 몰아세우는 것만큼이나 비상식적 아닌가.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재판을 통해 당사자의 반론을 듣고 객관적으로 죄질을 따진 뒤 처벌 수위를 정하는 게 법치주의 사회의 원칙이다. 야당도 아닌 여당 의원들의 성급한 총리 후보자 사퇴 요구는 법치주의의 수호자인 의원으로서 자격을 의심케 하는 행위다.

사퇴 촉구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가 이튿날 철회한 윤명희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연설 전문을 읽어보니 문 후보자의 소신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민지배는 하느님의 뜻’이란 말도 우리 민족이 각성하자는 뜻이지,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게 당연하다는 얘기는 아니더라.”

전문을 읽은 결과 문 후보자에 대한 판단이 뒤바뀐 것이다. 이런데도 “전문을 보고 안 보고가 중요하냐”고 할 수 있는가.

김 의원을 비롯한 초선 의원들이 기본적인 절차를 건너뛴 채 그런 성명을 낸 건 이들이 ‘침묵의 나선 이론’을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독일의 여론전문가 노엘레 노이만이 1974년 발표한 이 이론은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 사회에서 지배적 의견임을 알면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소수의 견해에 속한다고 판단하면 침묵을 지킨다는 내용이다. 대세를 파악하는 눈치가 빠르고, 쏠림 현상이 강한 한국 사회는 ‘침묵의 나선 이론’이 들어맞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친일처럼 민감한 이슈에서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그러니 “문 후보자의 연설 전문을 보고 친일 여부를 따져 보자”는 주장은 “뉴스만 봐도 뻔한데 뭘 더 따지나. 당신도 친일 아니냐”는 반박에 눌려 힘을 못 쓸 가능성이 크다. 새누리당 초선 의원들의 성명은 이런 기제가 부지불식간에 작용한 결과일지 모른다.

어차피 대통령이 결정하는 사안이니, 초선 의원들의 처신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처신이 가벼운 의원들이라면 다른 현안에서도 사실 확인 없이 출렁이는 여론의 흐름을 좇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바로 포퓰리즘 아닌가.

지난 20일 밤 MBC가 문 후보자의 온누리교회 연설 전체 동영상을 포함해 방송한 긴급 대담의 시청률은 6.6%(전국)를 기록했다. 동시간대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보다 높은 수치다. 반드시 중도 사퇴시켜야 한다고 으르렁거리는 이들이 여전히 많은 건 사실이다. 그 사이에 “절차에 따라 청문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원칙론도 커지고 있다. ‘침묵의 나선’은 계속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쯤 해서 멈춰 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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