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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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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공무원인 친구의 경험담이다. 몇 년 전 외부 위원회에 파견나갔을 때 나이가 비슷한 여성이 옆 팀의 팀장이었다. 직속 상사는 아니지만 윗사람인데도 그 여성을 마주칠 때 선뜻 인사하기가 쉽지 않더라는 것이다. 자신을 남성 우월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여성 상사를 왠지 어색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한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다.

경영 컨설턴트 앨리스 사전트는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 차별의 벽을 '유리 천장(glass ceiling)'이라고 불렀다. 그는 1987년 1월 워싱턴 포스트 기사에서 "미국의 직장여성들은 유리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고 있다"며 "올라갈 곳은 뻔히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천장 때문에 중역실로 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는 여성과 소수민족에 대한 승진 차별을 없애기 위해 91년 '유리천장위원회'를 만들었다.

성(性)이나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더욱 확실하게 금지하는 곳은 유럽이다. 유럽연합(EU) 의회는 모든 회원국이 ▶성별▶인종 및 민족▶장애▶성적 지향▶종교와 신념▶연령 등 6가지 요소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도록 하는 차별방지법을 내년부터 시행하도록 올해 초 의결했다.

노르웨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2007년까지 이사진의 40% 이상을 여성으로 채우지 않는 기업체를 폐쇄하겠다는 강경 방침을 최근 밝혔다. 기업 이사진의 40% 이상을 여성에게 배분하도록 하는 정책을 2002년 도입했지만, 아직도 이사회의 여성 비율이 11%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 현실은 까마득하다. 노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체 임원급 중 여성 비율은 1.9%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도 50% 미만이다. 각종 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이 30%를 넘고 있지만, 여성을 마뜩찮아 하는 풍토는 여전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총인구가 줄고 고령사회로 들어서게 되면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여성 인력을 활용해야 한다. 남녀평등을 위해서뿐 아니라 경제적 필요 때문에서라도 유리 천장을 없애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여성 상사를 어색해하면 안 될 상황이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