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잘날없는 일본대사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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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깝고 멀다는 한일관계-. 김대중씨사건에이어 대륙붕파동과 때를같이해 일어난 한일유착론이 잠잠해지자 일본의 대북한 접근론이나와 또한차례 높은 파고를 일게했다.
파고가 일때마다 영과 욕을 함께받으며 동분서주하는것이 주일대사이고 그래서 높고도힘든자리가바로 주일대사자리라고 말한다.

<북한문제재연 시간문제>
○…일본의 북한접근론은「오오히라」(대평)가 등장하고「소노다」(원전) 외상,「후루이」(고정) 법상,「다나까」(전중)관방장관이 핵심「멤버」로 조각되면서 표면화된 한일외교의 현안.
「오오히라」수상은 한일국교정상화협상초기「김종필·오오히라 메모」로알려져있지만 일·중공관계개선의 선봉장이자 대한소극론자. 여기에 3명의 장관의 이력을 보면 당장 북한「카드」가 나올 가능성을 점칠수있다.
일본군하사관 출신이자「촌장」으로부터 정치를 시작한「소노다」외상은 인기를 끌수있는 것이면 서슴없이 택하는 정치인이고, 일정때 내무차관을 지내 대한식민지 사관이강한 「후루이」법상은 근본적으로 한일관계의 현주소에 불만을 갖고있는데다,「다나까」관방장관은 평양의대변자 노릇을 하고있는「이와이」(암정·전노총사무총강)와 신문기자시절(조일신문) 부터 절친한 사이라는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 정치「트리오」의야심에외무성 정통관료들의 반대가 맞서 김영남일행을『노동당대표로는 입국시키지 않겠다』는 선에서 타협이돼발등의 불은 껐으나 이 문제의 재연은 시간문제로 보아야하며 그런점에서 주일대사의 역할은 명암이엇갈릴 수가 있다.

<「허니문」깬풍랑의 연속>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동 엄민영 이후낙대사시절, 이른바 한일「허니문」시절도 있었으나 이를깨뜨리고 양국관계에 풍랑을 몰고온 적도있다.
김영선대사는 동경의 한국대사관상공에 일본신문의「헬리콥터」가날아사진을 찍어갔고 언론과 일본내여론이 한국을 후려쳤던 기억은잊을수 없다고 지금도 술회하고 있을 정도다.
결국 김종필총리의「진사」로 정부간에는 사건을 단락지었지만 이이후 한일관계는 일본측의「무리」와한국측의「흥분」으로 일관됐으며 잇달아 문세광사건, 민청학련과 2명의 일본인구속, 주한일본대사관「데모」대 난입사건, 대륙붕파동, 일·북한접근책등 마찰을 겪는동안 공세와 수세가 엇바뀌는 난맥상을빚어왔다.
『일본에서는 본국정부의 목소리를적극 반영, 일본은 역사를 반성하라고 외치지만 한국에와서는 일본정부의 입장을 해명해야하는 것이주일대사』라고 말하는 김영선대사는『한일관계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 미래도 마찬가지지만 어차피사건으로 점철되게 마련』이라고했다.

<외교관보다는 "정치인">
○…물론 주일대사는 동서양외교의 접합점이자「아시아」외교의「센터」인 동경에서 미국·소련·중공대사와함께 4명의 중요사절중 하나로 꼽히고 국내에서는「거물」, 외무부에서는 동류의 외교관이라기보다는「정치인」으로 통하고 있기는하다.
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래 김동 ·엄민영· 이후락·이호·김영선·김정렴씨등 6대를 이어 오는동안 면면이 모두 당대의 실력자 아니면국가원수의 의사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전직각료급「측근」들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게다가 공사4명, 삼사관 10명을비롯해 14개부처에서 파견된 80여명의직원을 거느리고있어 숫자로도주일소련대사관 다음인 2位크기.
이런 부대를 거느리고 징치·경제·문화의 젖줄역할을 해온 특수임무때문에 흔히 주일대사는 외교관이라기 보다는「소총리」로 불리기도하며「안보의존」보다는 대소의 사건들로 점철된 한일관계의 특수성때문에 전인적인격이 유달리 요구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연2만불 특별지원받아>
○…그런만큼「대결」과「술수」의파고에휩싸여 자칫 본인의 능력과는관계없이 진퇴를 결심해야 할때가있고 이호대사의 경우가 좋은예다.
국교정상화 작업을 치러낸 김동 초대대사는 그후 외무부장관을 지냈고 엄민영대사가 현직에서 작고한것을 빼면, 이후락씨는 중정부장으로, 이호씨는 한적총재로, 김영선씨는 대한상의회장으로 진출하는등「훗발」도 보장돼 있다. 고위층으로부터 연2만「달러」의 특별자금도 지원받는 것은 특례.
주일대사에 거물을 파견하는 다른 이유는 원노정치를 존중하는일본정계에서 말발이 서지않으면 일하기가 어렵다는 풍토때문이기도 하며, 이점은 상대적이기도 해서「기무라」(목촌)·「가네야마」(금산)·「우시로꾸」(후궁)·「니시야마」(서산)·「스노베」(수지부)대사등역대 주한일본대사는 모두 2∼3개지역의 대사를 거친 노장급이었고 주한대사를 그만둠과 동시에 퇴역했다.
특히 일본이 남북한대치의 전선이라는 점, 조총련의 현지공작과 이에따른 동포보호·지위향상등「준통치」의 기능을 가진 사령관이어야하기때문에 외교업무 이외의 교민활동또한 폭이 넓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김동 ·엄민영·이호·김영선대사가 모두 일본고문합격자로 일정때 관료를 지냈다.

<외상보다 정치인 더만나>
○…「프러토콜」에 의한 전통적외교양식에 요점을 무대로한「밤의외교」라는 다른 하나의 「패턴」이교호작용을 하는것이 東京外交街다.
『젓가락으로 얻는 정보』(한국·중공)와『「나이프」·「포크」로 얻는정보』(미국·소련)가 막상막하여서 한국대사와 미국대사는 자연 친구가 될수밖에 없는 사이.
한국대사는 외상보다도 수상, 통산상·대장상이나 자민당정치인을 만나는데 더 시간을 할애할때가 많다는 것.
김영선대사의 경우『「다나까」전수상과는 의기가 투합하는 사이이고 김대중사건때 워낙팽팽히 맞서 당시 외상「기무라」(목촌)와는 남들이 원수지간인줄 알지만 사실은 친구라는것』이 김대사의 주장이다. 전통친한「그룹」이아닌 자민당내좌파(진보파)「기무라」(전외상)「고사까」(소판·경제기획청장관)등과 교분을 더 친한세력을 개척한것도 김대사의 업적.
외교「채널」아닌 개인 인맥을 통해 이뤄지는 사선외교가 중요한것도 한일관계의 특징중 하나. 자민당안의 복잡한 파벌, 일본정치의 다원화현상에 따른 부산물로 생겨난개인외교는 때에 따라서는 공식외교못지않은 효과를 나타낸다.
한국쪽에서 개인외교를 맡았던 인물로는 김종필전총리,백두진유정회의장, 고장기영·황종률씨가 있고 일본쪽에서는「시이나」(추명),「기시」(안신개) 등이 손꼽힌다.
최근에는 한일의원연맹(정치)·한일협력위(경제)·한일친선협회(민간·문화)등 단체로 구성된 외교지원 세력이 있고, 특히 이병위의원연맹간사장은 최영철의원과 함께「밀사」「특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일본정치인들과「형제」외교를 벌인다고 말을 들을 정도다.「오오히라」「후꾸다」「다나까」등은 물론민사·공명간부들도 수시로 만날수있는것이 무기이며 l년 평균40여회 일본왕래기록을 갖고있다.
5년간이란 최장수기록을 남긴 김영선대사는 『일본정부가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양보한것이 없으면서도 나에게 불유쾌하거나 위압적인대접을 하지않았고, 그런데서 일본외교의「테크닉」을 배웠다』며 『우리도 대일본외교에서 국민감정만 앞세울것이 아니라 좀더 어른스러워져야 한다』고 대일외교의 교훈을내놓는다. <전 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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