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2세 1920~2005] 봉두완 정부 조문사절이 본 세기의 장례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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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떠나보내던 8일 오전(현지시간)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는 흰 비둘기들도 하늘을 날지 않았다. 세기의 장례식장의 엄숙한 분위기에 눌렸던 것일까. 하얀 미사보로 얼굴을 가린 채 울먹이는 여인, 그 옆에서 마냥 눈물을 삼키고 있는 수녀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 장엄한 장례식을 TV를 통해 지켜본 지구촌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 마음이었으리라.

이곳 날씨는 18도 내외로 쾌적한 편이었다. 그러나 성 베드로 성당은 천주교의 오랜 전례(典禮) 전통이 보여주는 엄숙함과 함께 지구촌의 종교 지도자를 떠나보내는 비통스러움이 겹쳐져 각별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그것은 과장없이 우리 시대의 장관이었다. 특히 '악의 축''폭정의 전초기지'로 부르며 증오를 키워 온 미국과 이란 등 적대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모처럼 마음의 문을 연 공간이었기 때문에 뜻깊었다.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장례식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고위 성직자들만의 비공개 의식(입관식)에 이어 열렸다. 입관식에서 사제들은 교황의 유해가 담긴 관 속에 그의 생애 업적을 적은 두루마리 기록을 교황의 얼굴을 덮은 흰 비단 베일과 함께 넣었으리라. 이어 추기경단 의장인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의 집전으로 거행된 장례 미사는 "주여, 영원한 안식을 내리소서"라는 입당송으로 시작되며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관이 8일 바티칸에서 거행된 장례식중 운반되고 있다(AP=연합뉴스)

거듭된 영결사와 고별 의식, 그리고 기도가 차곡차곡 진행될 때 나는 인류의 의식 중에서 이토록 아름답고 경건한 의식이 따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위엄이 넘쳤다. 교황청의 봉인이 찍힌 붉은 띠로 둘러진 관은 성당 지하무덤에 안치되는 의식과 함께 장례 미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유지를 잘 받드는 일이다. 이 몫에 대한 인식은 장례식장 우측에 자리 잡은 이해찬 총리를 비롯한 정부 조문사절단을 포함해 전 세계인들의 가슴에 새겨졌을 것이다.

사실 바티칸 측은 국가별로 조문단을 5명으로 엄격하게 제한하는 바람에 이 총리와 한승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소설가 박완서씨, 이기우 총리비서실장, 그리고 나까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최창무 대주교를 포함해 정명조.장익 주교 등 네 분으로 구성된 한국 천주교 조문대표단도 좌측 중간에 자리 잡아 세기의 장례식을 함께했다.

정부.천주교 조문단 일행은 7일 저녁 주바티칸 한국대사관 관저에서 '심야 만찬'을 함께했다. 오후 11시에 진행된 만찬은 누적된 피로에도 분위기는 참으로 좋았다. 이런 말을 한 것은 이 총리였다.

"이곳 바티칸의 분위기는 남미.아프리카.아시아 등 제3세계에 관심이 많더군요. 차기 교황님도 이 지역에서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피선거권은 가지고 계시니 이틀 뒤부터 콘클라베를 통해 세계 천주교의 영적 지도자로 추대받으실 수 있고요. 자, 김수환 추기경님과 한국 천주교를 위하여!"

모두 흔쾌한 얼굴이었지만 우리 일행은 이튿날 숙소를 새벽같이 빠져나오며 3시간이 넘는 행사를 '무사히' 치르기 위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말자는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세기의 장례식을 진지하게 지켜보았고, 한국 정부를 대표한 조문단 일행이라는 뿌듯함으로 발걸음마저 가벼웠다. 어려움 속에서 자란 사제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위 26년의 노력 끝에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고 의미 있게 바꿔놓고 가신 것이다.

교황님의 생전 모습을 나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잠시 떠올려 본다. 나는 교황님을 공식.비공식적으로 몇 차례 뵙는 행운을 누렸다. 1984년 방한을 앞두고 바티칸 집무실에서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교황을 알현할 때 교황님은 내가 북한에서 월남한 가족이라고 하니까 "현재의 북한 실정은 어떠냐"하며 한국과 한국 천주교회의 앞날에 더 없는 관심을 보였다.

성 베드로 광장을 꽉 메운 슬픈 400만 인파에게 교황님은 "부디 행복하시오. 평안하시오"하고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나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교황님, 당신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합니다. 영면하시옵소서."

봉두완 (한국 천주교 민족화해센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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