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산책] 장거리 신기록 제조기 이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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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된 훈련을 마친 이은정이 6일 저녁 숙소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책을 읽고 있다.박종근 기자

"달리는 게 재밌어요."

마라톤우먼 이은정(24.삼성전자.사진)은 웃으며 말한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딴 뒤 이렇게 말했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 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지옥 같은 훈련을 이은정은 "즐겁다"고 한다. 지난 3일 베를린 국제하프마라톤대회에서 한국신기록(1시간11분15초)을 세우고 돌아온 이은정을 6일 경기도 기흥의 삼성전자 육상단 캠프에서 만났다.

보통 키(1m65㎝)에 가냘픈 체격, 안경을 낀 차분한 표정. 겉으로 봐선 그가 한국기록을 연방 갈아치우고 있는 '한국 여자마라톤의 희망'이란 느낌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달리는 모습을 보면 '타고났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생고무 같은 탄력과 스피드. 마치 흑인선수들의 주법을 연상시킨다. 발목과 무릎관절의 탄력이 워낙 뛰어나고 폐활량이 크다.

거기에 강(强)심장이다. 웬만한 일로는 흔들림이 없다. "출발을 앞두고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오히려 태평스러울 정도라니까."(오인환 삼성전자 육상단 감독) 지난주 베를린 대회 출발을 앞두고 팀 관계자가 물었다. "쟁쟁한 선수들이 많은데 떨리지 않아?" 그랬더니 "다른 선수한테 신경쓸 일 있나요"라고 했다. 그리고 초반부터 레이스를 주도했고, 한국신기록으로 2위를 했다.

레이스 도중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기록 단축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훈련할 땐 훈련에만, 달릴 땐 달리는 것만 신경쓰지요. 그리고 쉴 때는 푹 쉬어요." 많은 마라토너들이 부모 얼굴, 고되게 훈련하던 때를 떠올리며 이를 악무는 것과는 다르다.

?매일 네 시간씩 달린다

일과는 오전 5시에 일어나 7시까지 트랙을 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침 먹고 10시부터는 또 한 시간 이상 헬스장 훈련이다. 오후엔 크로스 컨트리나 인터벌 트레이닝으로 지구력과 스피드를 키운다. 취침은 10시. 7, 8월엔 강원도 고지(횡계 또는 태백)에서, 12~3월에는 제주나 해외로 간다.

저녁 자유시간에도 그는 조용하다. 숙소 컴퓨터실에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마라톤 사이트에서 정보를 훑어보는 게 거의 전부다. 아니면 휴게실에서 동료들과 잡담하거나, 방에서 음악 듣고 소설책을 뒤적인다. 가끔 친구들과 전화나 문자메세지를 하지만 남자친구는 없다.

?"휴가 땐 고향집서 실컷 자"

운동을 시작한 건 우연이었다. 초등학교 6년 때 체육교사가 권유했다. "체육시간에 달리는 걸 보고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중.고교땐 중거리(800m, 1500m)를 뛰다가 2000년 충남도청에 입단하면서 장거리로 전향했다. "고3 말쯤 슬럼프가 왔어요. 그때 시험삼아 장거리를 달려봤는데 중거리보다 편해서 자연스레 전향했지요."

이은정은 4~5개월에 한번 휴가를 받아 부모가 농사를 지으며 사는 고향(서산)에 간다. "가면 고향 친구들 만나 수다도 떨고, 잠도 실컷 자요." 가끔 농사일을 돕고 싶지만 논 근처엔 얼씬도 못한다. "뛰는 것도 힘든데 푹 쉬다가 가"라며 부모가 손사래를 친다.

?지난해부터 '신기록 제조기'로

그는 지난해 3월 서울국제마라톤에서 한국기록(2시간26분12초, 1997년 권은주)에 5초 모자란 기록으로 우승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어 10월 전국체전 5000m에서 7년 묵은 한국기록을 갈아치웠다. 그 한 달 뒤 삼성전자에 스카우트돼 체계적으로 조련되고 있다.

오 감독은 한국의 모든 장거리 기록이 이은정에 의해 깨질 것으로 본다. "상반기 중에 5000m와 1만m 기록을 깰 계획"이라고 했다. 현재의 5000m 기록은 이은정 자신의 것, 1만m 기록은 정윤희(도시개발공사)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때 세운 것이다. "하반기엔 풀코스(42.195㎞)에 도전시킬 생각입니다. 2년 이내에 2시간20분대 초반에 진입하는 게 목표지요. 자세를 좀 낮춰 체력소모를 줄이고, 체력과 스피드를 더 보강하면 모두 가능할 겁니다."

기흥=신동재 기자<djshi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 이은정은

▶ 출생=1981년 충남 서산

▶ 부모=이대형(55).김동숙(53)씨의 3녀 중 둘째

▶ 체격=165㎝.49㎏

▶ 혈액형=A형

▶ 학교=서산 산성초-성연중-서산농공고

▶ 취미=음악듣기, 책읽기

▶ 주요 성적=2004년 3월 서울국제마라톤 1위(2시간26분17초), 10월 전국체전 5000m.1만m 우승(5000m.한국신 15분54초44), 2005년 2월 일본 이누아먀 하프마라톤 1위(1시간11분36초.한국기록), 4월 독일 베를린하프마라톤 2위(1시간11분15초.한국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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