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장자의 아량|이난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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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과의 청소년 축구 경기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방글라데시」에서부터 울러 퍼졌다. 모름지기 싸움에는 이겨야하는 것, 우선 이겨놓고 봐야한다는데 이의는 없다.
그러나 승리를 구가하는 태도에 조금은 장자다운 풍모를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경기가 끝난 후 북한 선수들은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일어나지 못하더라는데, 그리고 우리 선수들이 청하는 악수를 거절해서 야유를 받았다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 우리들만은 그들을 이해하고 비난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죽했으면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날 줄 몰랐을까? 불행히 우리가 졌다해도 우린 잘 싸웠다. 기특하다고 위로를 주고받지만 그들은 호된 비판의 채찍을 받아야 할 테니 얼마나 난감했겠는가? 눈앞이 아뜩했으리라, 그들은 등뒤에 퍼부을 무서운 몰매에 얽매인 것뿐이다.
북한의 선수들은 바로 우리의 자식일 수도 조카일 수도 또 아우일 수도 있는 내 핏줄 아닌가? 마치 버려진 의붓자식처럼 운동장에 무릎꿇고 난감해 하는 그들에게 우리들은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주고 두려움과 그늘에 시달리는 그들의 기를 펴주고 인정이 뭔지 핏줄의 뜨거움이 뭔지를 가르쳐 줬으면 싶다.
남의 땅에 가서 동포끼리 싸워야 하는 이 시련 속에서 결코 우리는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되겠다. 그들이 비록 우리를 증오한다 해도 그렇게 만드는 원흉은 따로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주어야 하겠다.
지난번 송환된 북한의 어부가 판문점에서 벌인 저 부끄러운 「해프닝」은 그들의 등뒤에 도사린 이른바 「당」의 끄나불이 조종하는 것이 아닌가? 난생 처음 차 보는 그 시계, 처음 입어보는 멋쟁이 양복이 그 어부들에게 얼마나 흐뭇한 선물이었겠는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것을 「지시」애 따라, 상부의 눈이 무서워 벗어 팽개치면서 가슴속으로 얼마나 아까왔을까? 지금도 그들은 그때 팔목에 느껴지던 시계 줄의 촉감이 아쉽기 짝이 없을 것이다. 포근하던 속옷이 새록새록 생각날 것이다.
우리가 보내겠다는 양곡을 그들은 거부했었다. 정말 필요가 없었을까? 야욕에 눈먼 허황된 콧대가 많은 내 동포의 허리끈을 졸라매게 했을 것이다. 만사에 우리는 그들을 능가하고 있다.
내 배가 부르고 내 등이 따스하니 더욱 더 아픈 내 형제에게 따뜻이 대하고 감싸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그들이 턱없이 강하게 버틸수록 우리는 관용의 미덕을 베풀고, 만사에 장자의 금도를 가지고 대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국립 박물관 학예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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