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8)「미국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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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소위 국방헌금 반대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나는 동경에서 두 번째로 경찰에 잡혀갔다. 나를 연행한 「나까노」(중야)경찰서의 고등계형사 「우라다」(패전) 는 전자에 나로부터 은혜를 입은 터라 매우 동정적이었다. 그의 가족들이 이질에 걸려 사경을 헤맬때 평괴약국에서 조제한 치중산으로 그쳐준 일이 있었다.
헌금반대사건은 「가나도리」라고 창씨 개명한 교회 재무담당 김모 장로가 꾸민 무고극이었다. 그는 교화 건축을 반대하고 재산을 탐내오다가 전쟁이 터지자 나를 비룻롯 몇몇 교직자를 쫓아낼 음모를 꾸몄다. 조선인으로 일본인의 양자가 된 「하도리」형사와 짜고 투서를 냈기 때문에 김치선목사와 김덕영권사·필자 등이 모두 경찰에 불려간 것이다.
투서의 내용은 『석재경은 박영출·양학만과 모의하여 재일 조선인 학생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며 대동아 성전을 위한 교회헌금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우라다」형사가 호의적으로 감싸주었기 때문에 얼마 뒤에 무혐의로 풀려 나올 수 있었다. 나는 그 길로 귀국하면서 신들돌에게 김치선목사를 중심으로 교회를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김목사는 당초 「고오배」(곤호)의 조선인교회 목사였는데 내가 「캐나다」선교사 「영」목사 (형재당)를 실득하여 동경으로 모셔왔던 터였다.
내가 귀국해 장로교총회에서 전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을 때 동경중앙교회 교직들이 김목사를 배척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침 남대문교회의 김영주목사가 새문안교회로 옮겨간 뒤 김치선목사가 남대문교회를 맡도록 뒤에서 일을 만들었다. 김목사는 한때 박태선장로와 함께 전도관 일을 보기도 했으며 대한신학교를 설립하여 후배를 기르다가 여러 해 전에 타계하셨다.
2차 대전 중 동경조선인교회는 크게 황폐했다. 국방헌금반대 사건을 기화로 교회내분이 생겼는데 다가 전쟁통에 교회건물은 부숴지고 교회대지까지 남의 손에 넘어갔다. 해방 후 동경에 남아 있던 청년신도 몇 사람이 「맥아더」사령부에 호소하여 땅을 되찾아 교회건립에 나섰다. 「캐나다」선교회와 미국북장로회에서 2만「달러」를 보내주어 건물을 지었으며 지금까지 오윤태목사가 동경중앙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목회일을 보고 있다. 1957년째 건물이 낡아 금이 가고 비가 샌다는 말을 듣고 내가「뉴욕」에서 3천「달러」를 선교부에 주선해 보낸 일도 있다.
내가 미국의 소리 「아나운서」로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장로교 총회의 업무에 많이 관계해왔다. 「미국의 소리」에 들어가게 된 것도 장로교 총회대표로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총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35년 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장로교 총회종교교육부에서 총무로 있던 정인과목사가 나를 부르더니 찬송가 번역과 편집일을 맡겼다. 그해 10월에 광주에서 열리는 층회에서 번역된 찬송가를 승인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양선교사들은 기독교 서회에서 찬송가 판권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장로교총회는 총회대로 독자적인 판권소유를 주장하고 있었다.
회산 이은상선생이 『저 높은 곳을 향해 날마다 나아갑니다』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춘원 이광수선생도 『이 봄의 소망무언가. 우리 예수뿐일세』라는 찬미가를 번역했다. 그런데 첫째 절은 번역이 잘 되었으나 둘째, 셋째 전에는 교회에서 쓰지 않는 용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춘원은 3절을 『덧없고 못 미덥던 인연을 저 세상에서 맺으리』라고 옮겼는데 이런 표현은 성가로는 적당치 못한 것이었다.
나는 이 귀절을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이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고 고쳤다.
내가 직접 번역한 것도 50곡이 넘는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길이…』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저 요단강 건너편에 화려하게 뵈는 집…』 같은 찬송가가 그것이다.
찬송가 번역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본래의 뜻을 살리기 쉬운 우리말로 음률에 맞춰야한다. 고심 끝에 장로교의 신편찬송가가 출판됐는데 광주총회에서 춘원의 신분을 두고 큰 논란이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기독교에서 파문 당하고 불교로 전향한 춘원이 번역한 찬송가를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원문과 춘원의 번역문, 그리고 내가 교정한 내용을 들고 나가 『이 몸의 소망은 무엇인가…』 를 어느 누군가 번역해도 그 이상 잘 번역할 수가 없다고 증언했다. 총회에 참석했던 선교사 「로즈」(노해리) 목사가 나서서 춘원의 번역에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여 그 문제는 원만하게 수습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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