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시원한 법률 이야기] 각서만 있으면 재산 분할 끝? 부부 사이엔 상황별 적용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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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게 이혼상담을 요청하는 의뢰인들이 가장 많이 갖고 오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각서’다. 남편 혹은 아내로부터 받은 각서에 대한 효력 여부를 묻기 위해서다. 내용은 대부분 ‘향후 전 재산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일단 ‘전 재산 포기 각서’의 효력을 따져보려면 각서의 작성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 대법원은 혼인 해소 전에 미리 재산분할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은 성질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각서를 혼인 중 작성했다면 아무 효력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반대 해석으로 혼인이 해소된 뒤 구체적으로 발생한 재산분할청구권은 포기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미 파탄 상태에서 협의이혼을 전제로 포기각서를 작성하고 협의이혼을 했다면 각서는 유효하다.

 ‘전 재산 포기’ 같은 극단적인 재산분할이 아닌 통상적인 재산분할에 관한 협의나 약정의 효력은 어떨까. 예컨대 당사자 사이에 ‘이혼하고 재산 중 부동산은 남편이, 예금과 가재도구 등은 부인이 갖는다’고 합의한 것이다.

 일단 대법원은 아직 이혼하지 않은 당사자가 향후 협의이혼할 것을 약정한 뒤 이 같은 재산분할에 관한 협의를 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당사자가 약정한 대로 협의상 이혼이 이뤄진 때에 한해 효력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원인으로든 협의이혼이 안 되고 혼인관계가 존속되거나 당사자 일방이 제기한 재판으로 이혼한 경우 그 협의는 무효라는 입장이다.

 재판상 이혼에는 법원의 화해 권고나 조정에 따른 이혼까지 포함된다. 이에 따라 협의이혼을 못하고 재판으로 이혼한 경우 각서는 무효가 돼 이혼청구와 병합, 재산분할청구를 새로 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 당사자 간 사전에 재산 관련 각서를 작성할 때 약정에 이르게 된 경위(예컨대 불륜관계·폭력행위 등)도 내용에 포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협의이혼이 되지 않고, 재판상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유력한 증거나 지표로 쓰이고 있어 그리 낙담할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작성된 재산권 관련 각서는 그대로 이행돼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부부 사이에는 재산분할에 대한 각서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단순히 각서 한 장 받아놓았다고 안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유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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