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329)|함순원시절(제59화)|병원협회와 발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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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5는 함춘원은 물론 우리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창조적이그 발전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함춘원도 변했다 발전했다 그리고 새로운 의욕으로 충만했다. 생산적인 변화의 물결이 함춘원을 휩싸고 있을때 대학병원장의 중임을 맡았으니 나는 책임감과 사명감의 나날을 보냈다. 병원의 현대학에 최선을 다 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함춘원의 식구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의대와 병원의 개혁에 앞장섰다.
갖가지 어려움과 애로에도 불구하고 「ICA·미네소타」 계획은 나의 병원장 시절 가장 활기있게 착착 진행됐다.
한편 나는 학생들의 교육에 두눈을 돌려 그동안 강의위주였던 의학교육을 임상실습에 치중하는 산 교육으로 바꾸었다. 시험도 논문식으로 한 두문제 내던것을 객관식으로 고치고 문제수도 대폭 늘렸다.
그리고 6·25의 경험에 비추어 신경외과와 흉곽외과에 크게 비중을 두어야 했다. 지금 새삼기억에 새로운 일은 흉곽외과의 이령균교수를 특별히 지원해서 당시 우리 의료계 실정으로서는 하나의 모험이었던 심장수술을 장려했던 점이다.
얼마전 이교수가 심장수술 1백 「케이스」를 돌파했다는 「리포트」를 듣고 그의 공로에 경하해마지 않는다.
또 내과의 강석영교수와 그 무렵 새로이 등장한 「앨러지」병에 대해 상의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여러해에 걸쳐 「앨러지」 병의 발생원인이 되는 「앨러지」을 구명키 위해 그토록 부심하던 그가 지금은 이 분야의 대가가 되었으니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한편 아무리 대학병원장으로서, 할 일이 바쁘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과학회활동을 비롯해서 병원협회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58년6월18일 대한내과 학회장으로 피선된 나는 무엇보다도 인화를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임 3년 4개월 동안 「내과학회발달 10년사」후 심호섭선생 희수기념호 발간에 즈음하여 「내과학회창립 15주년 기념사」 등 3편을 엮어 낸바 있다.
이야기가 잠깐 뒤로 건너뛰지만, 61년10월15일 나는 우리나라 소화기병 내과의 창시자 대접을 받고 .대한소화기병학회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소화기내과라는 말은 내가 교수로 있던 서울의대의 제2내과가 개정된 것이어서 나를 그렇게 대접해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병원의 시설과 제도를 완비하고 개선해서 보다 나은 의료를 베품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복리증진을 도모하겠다는 목적으로 대한병원협회가 창립된 것은 59년 7월2일 서울에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족하는 병원의 단체여서 의료계는 물론 일반국민의 기대가 컸다.
68명의 회원이 참석 투표를 한 결과 초대회장에 내가, 그리고 차기회장에 이용설박사가 선출되었는데 나는 「나는 친절하고 깨끗한 병원」 「의사·간호원의 재교육」 「영양사와 기술사의 확보」 「병녹실과 도서실의 정비」 「병원개방제도」등 우리나라 병원의 나아갈길을 제시 역설했었다.
특히 국가정책으로 질병에 대한 보험제도 실시를 당국에 촉구한 사실은 특기할만 하다고 하겠다. 당시 나는 『보건문화』지에「대한의 병원이 나아갈 길」 이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바 있다.
『병은 급하고 중한데 돈이 없어서 그냥 병원문을 두들긴 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더우기 야간통금 때라면 어떻겠는가. 일부 병원에서는 시설부족과 병실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보다 큰 병원을 찾아가기를 종용할 것이다. 이런 환자거부가 두세병원에서 되풀이되는 경우 오해도 생기고 간혹 세간의 물의를 일으켜 신문지상을 요란하게 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병원의 입장으로 볼때 예산관계상 정규사무절차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과연 의는 인술이라 금전에 대해 구차해서는 안되고, 또 돈을 생각하면서 환자를 치료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국은 의사가 금전에 구애되지 않고 최선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도록 대책을 강구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국가적으로 질병에 대한 보험제도를 실시하는 것이고, 다른 환자를 위한 모금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학병원장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60년 4월19일 학생의사에 의한 민주혁명이 일어났다.
그날은 분명 「피의 화요일」이었다.
이 정권의 부정과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데모」연가 서울시가를 휩쓸고 있을 때 나는 병원의 전직원에게 비상근무를 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총상을 입은 「데모」 학생과 시민들이 피투성이가 된채 병원에 밀어닥쳤다. 1백명의 의사와 60명의 간호원이 밤새도록 응급 치료한 부상자는 1백40명이나 되었다.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이 빗발치는 탄환을 헤치고 「데모」현장으로 뛰어들어가 응급환자를 떠메고 오다가 총대을 입는가 하면 수혈할 피가 부족하자 의사·간호원·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헌혈하는 눈물겨운 장면도 보였다.
나의 병원장 시절을 통해 4·19때처럼 위문객과 위문품이 답지한 것을 보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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