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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화려했어도 은퇴 후 명함엔 옛 직함 넣지 마세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조용철 기자

우스개 한 토막. 오랜만에 만난 두 할머니가 반갑게 얘기를 나눈다.

“바깥어른은 잘 계신가요.”

“지난주에 죽었다오. 저녁에 먹을 상추를 따러 갔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쓰러졌지 뭐요.”

“쯧쯧 정말 안되셨네. 그래서 어떻게 하셨수.”

“뭐 별수 있나. 그냥 시장에서 사다 먹었다오.”

이쯤 되면 ‘장수 만세’가 아닌 장수의 비극이라 해야 할까. 이 서글픈 유머를 들려준 이는 최재식(59·사진) 전 공무원연금공단 연금사업본부장. 그가 지금 쓰고 있는 명함엔 ‘은퇴연금 전문가’라고 새겨져 있다. 그는 총무처와 공무원연금공단에서 37년간 근무하다 지난 1월 퇴직한 뒤 현재 성균관대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가 맡은 강의는 대학원 석·박사 과정의 ‘변화관리’.

그는 은퇴 이후의 시간이란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니라 ‘관리’해야 할 정도로 길다고 강조한다.

“60세에 은퇴해 80세까지만 산다 해도 8만 시간이 주어집니다. 하루 여유시간을 최소 11시간으로 잡아도 ‘11시간×365일×20년’이면 그런 숫자가 나오지요. 현재 우리나라 직장인의 연평균 근로시간이 2090시간이니까 정년퇴직 후 8만 시간이란 38년간 직장생활을 하는 것만큼이나 긴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으려면 은퇴 준비를 미리,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은퇴관리론은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만 앓고 죽자”는 ‘9988234’처럼 추상적이거나 모호하지 않다. 미국의 경영학 거장 존 코터의 변화관리(Change Management) 이론을 토대로 삼아 구체적이다. 코터는 1980년 불과 33세에 하버드대 역사상 최연소 교수로 임용된 인물이다. 그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를 통해 발표한 논문은 25년간 150만 부 이상 판매됐다. 코터의 변화관리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변화하는 외부 환경을 감지하고 기업 스스로 어떻게 적응하는가가 곧 혁신의 길이요,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

한마디로 기업에 있어 변화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얘기다. 최 교수는 “기업은 상시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촉수를 곤두세우고 끊임없이 혁신해야 하지만 개인은 꼭 그럴 필요는 없다”며 “다만 정년퇴직이라는 엄청난 변화에 대해서만큼은 심리적·정신적·재정적으로 준비해 둬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은퇴관리론은 기업의 변화관리를 개인에 맞게 수정한 모델이다. 그럼, 코터의 변화관리 8단계는 어떻게 구성돼 있을까. 1단계 위기감 조성에서 시작해 2단계 변화 추진 구심체 구성, 3단계 비전과 핵심 전략 창조, 4단계 비전 전파, 5단계 변화의 장애물 제거하기, 6단계 단기적 성과를 위한 계획 수립과 실천, 7단계 달성된 성과의 통합과 후속 변화 창출, 마지막 8단계 혁신적 변화의 제도화로 이어진다.

두 번째 삶, 본질적 가치 추구해야 행복
최 교수는 이 여덟 단계를 ‘은퇴관리 5단계’로 단순화했다. ‘은퇴 준비 필요성 절감’에서 시작해 ‘도전에 나서기’까지 단계별로 그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나는 얼마나 은퇴 준비가 돼 있는가’ 하는 물음에 맞닥뜨리게 된다.

먼저 1단계는 ‘위기 감지’다. 위기 감지는 은퇴 이후 내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긴지 자각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최 교수는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라는 용어를 명심하라”고 강조했다. 호모 헌드레드는 유엔이 2009년 작성한 ‘세계 인구 고령화(World Population Aging) 보고서’에서 공식화한 용어다. 이 보고서는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는 국가가 2000년에는 6개국에 불과했지만 2020년에는 31개국으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했다. 100세 이상 장수가 보편화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 61세였던 평균 수명이 지난해 82세를 넘어섰다. 최근 국내 한 연구팀은 현재 40대 중반인 71년생들의 경우 50%가 100세 가까이 생존할 것이란 전망치를 내놨다.

최 교수는 위기 감지의 노하우로 은퇴한 선배들의 생활을 눈여겨볼 것을 권했다.

“대개 퇴직 후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가 느지막이 식당이나 커피숍 같은 자영업에 뛰어들곤 하지요. 하지만 3년 내 문을 닫고 그 이후엔 생활고에 시달리는 게 일반적인 패턴입니다. 선배들의 그런 실패가 곧 내 얘기가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활고에 시달릴지도 모르는 시기가 30년이나 된다는 걸 자각해야 은퇴 준비에 대한 동기 부여가 되지요.”

위기를 감지했으면 두 번째로 ‘비전 정립’에 나설 차례다. 그는 “비전 정립은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지만 결국 자기를 다시 돌아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1차 직업이 끝난 뒤 가교 직업(bridge job)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혹은 직업이 아니더라도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는 비전을 정립할 땐 수단적 가치보다 본질적 가치에 집중하라고 주문했다. 1차 직업의 경우 가족 부양이라는 수단적 가치가 강조됐다면 2차 직업은 일 자체로 즐거울 수 있어야 노년의 삶이 풍성해진다는 얘기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만들기를 예로 들었다. 어떤 이가 미켈란젤로에게 물었단다. “차갑고 생명도 없는 대리석을 어떻게 이렇게 포근하고 감성이 풍부한 인간의 모습으로 경이롭게 조각할 수 있었습니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답했단다. “나는 대리석에 조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대리석 안에 들어 있던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필요 없는 대리석을 쪼아낸 것 뿐입니다.”

최 교수는 “수단적 가치가 되는 일들을 배제한 뒤 남는, 꼭 하고 싶은 일이나 가장 보람을 느낄 일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비전 정립”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비전은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구체적일수록 좋다”고 했다. “60년대 미국 과학계엔 ‘달 착륙’이라는 비전이, 60~70년대 한국엔 ‘증산·수출’이라는 비전이 있었지요.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목표가 아니라 그처럼 구체적인 이미지를 비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비전과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괴리를 메워 주는 일이 바로 3단계 ‘자기계발’이다. 그는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기계발을 적어도 은퇴 5~10년 전 시작하라”고 권했다. 관심 분야의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거나 연구모임에 가입하고, 필요할 경우 학위를 취득하라는 것이다.

그 자신도 퇴직을 10년 남겨 둔 40대 중반에 시작해 6년에 걸쳐 행정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학위가 현역 생활에도 도움이 되지만 은퇴 이후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데 더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물론 비전의 이미지가 무엇이냐에 따라 학위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자기가 세운 비전에 맞는 준비를 미리 하라는 얘기다. 그는 “은퇴 후 전원 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근교에 주말농장을 꾸리거나 텃밭 가꾸는 일을 빨리 시작할수록 좋다”고 덧붙였다.

비전을 정립한 뒤엔 ‘장애물 제거’에 나설 차례다. 은퇴 이후 비전대로 살기 위해서는 걸림돌이 없어야 하는데 이를 한꺼번에 없앨 수 없으니 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는 우선 경제적 장애 제거를 주문했다. 그는 “은퇴 직후부터 국민연금이 나올 때까지 대략 5년의 소득 ‘크레바스’가 생긴다”며 “살던 집을 매달 임대소득을 받을 수 있도록 재건축하거나 개인연금을 미리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고 권했다.

그는 특히 빚이 있다면 퇴직 전에 고정 소득이 있을 때 반드시 청산하라고 당부했다. 은퇴 전에 부동산 처분 등 자산 재배치를 통해 빚을 털어내도록 조정하란 얘기다. 이자 부담은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더 크게 느껴지고 노년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일시금과 연금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무조건 연금을 선택하라”고 권했다. 남은 생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목돈을 일시 수령하는 것보다는 매월 고정된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노년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위까지 내려놓는 마음가짐 중요
장애물 제거에서 간과해선 안 되는 게 또 있다. 바로 심리적 전환이다. 그는 “이전의 삶에 작별을 고하는 것, 은퇴와 동시에 몸뿐 아니라 과거의 내 지위까지 은퇴시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과거 지위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전진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현직이 화려했던 사람일수록 은퇴한 뒤 명함에 전(前)이라고 표시된 과거 직함을 써 넣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내재된 지위의식과 자존심을 버리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차원에선 새로운 현직을 써 넣는 게 더 중요합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채 은퇴를 맞는 이들은 대부분 한동안 ‘정년 공황’에 빠진다. 실제 그에게 상담을 해 온 사람 중에는 은퇴한 뒤에도 아침마다 양복을 챙겨 입고 전 직장 근처까지 갔다는 이가 여럿 있었다. 이들은 회사 가까이 갔다가 “아, 더 이상 내 회사가 아니지”라며 돌아서며 울적해한다는 것이다.

“돌아설 때의 그 섭섭함·허탈함·소외감·당혹감이 바로 정년 공황인데 이를 겪지 않으려면 회사와 이별하는 순간을 맞을 심리적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까지 끝냈다면 마지막 ‘도전 시작’의 단계다. 그는 “수명이 연장되면서 덤으로 주어진 30년은 화려한 삶이 아닌 ‘가치 있는 삶’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좋다”며 “은퇴를 절망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비상이라고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론 은퇴관리는 노후가 아닌 ?노전(老前)관리?이고 활동기에 차근차근 준비해 점진적으로 은퇴하는 것이 현명한 퇴장”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 나오는 ‘황혼의 반란’ 이야기 한 토막으로 말을 맺었다.

“노인이 넘쳐나고 사회보장 적자가 심해지자 70세 이상 노인을 배척하는 운동이 벌어집니다. 약값과 치료비마저 제한받지요. 젊은이들은 노인들을 ‘자기 몫의 회전목마를 돌고도 내리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우리 사회가 비극적 소설을 닮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한 뒤 흔쾌히 회전목마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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