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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택 기자의 '불효일기' <26화> 암환자표 '세계사 편력'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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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네 옷은 여기 다 챙겨 놓았다. 지금은 작은 집에 살고 있으니 너나 네 아내나 옷을 본가에서 덜 가져왔겠지. 앞으로 계절이 바뀌면 여기서 옷을 챙겨가라. 지금이야 내가 서랍장별로 정리를 해놨지만, 내가 없으면 네 엄마는 정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다. 붙여놓은 것 보면서 잘 챙겨가도록 해라."

"앞으로는 어떤 직업도 철밥통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한다. 네 아내도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특기를 기르고 영어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싫고 귀찮고, 나이가 들었다고 하더라도 영어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너 역시 영어 공부를 계속해야 함은 물론이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훈계를 한다. 훈계의 종류는 사실 뻔하다. 운동을 해라,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 일은 잘 하고 있느냐 등 3가지 유형이 기본적이다. 그 외에도 당면한 현안들에 대한 잔소리가 이어진다. 잔소리의 범위는 대중없다.

서른 살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당부는 거의 잔소리 수준으로 들려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버지의 훈계가 반갑다. 오히려 아버지가 날 생각해 준다는 것, 또는 아버지가 아직은 덜(?) 아프다는 증표 정도로 인식될 때도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아버지의 훈계를 담담히 듣고 가능한 것은 따르는 편이다.

아버지는 평생 교육이라는 이야기를 20년 전부터 달고 다녔다. 원래 학생들을 주로 상대하는 직업을 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유독 한 평생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10년, 20년이 지나고 보니 평생 교육이 필요하고, 정년 60세 시대가 다가오니 젊은 나이더라도 앞으로를 준비하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아, 아버지가 중3 때 중국어 좀 배우라고 할 때 열심히 해볼 걸"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이미 늦었기도 했고 또 늦지 않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내게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우라고 이야기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말을 듣지 않은 것도 많았다. 굳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 같은 뻔한 소리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지금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선배들도 꾸준한 배움을 진행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아버지의 뜻을 잘 못 헤아렸던 것 같다.

아버지는 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끊임없이 하신다. 자녀계획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기억나는 아버지의 훈계들

아버지는 내게 많은 훈계를 했지만, 매주 한 차례 이상 하는 훈계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아버지의 말씀을 원문대로 살려 적어본다.

살을 빼라

"기자로 일을 하면서 술도 많이 먹고, 사람도 많이 만난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프로의 세계에서 허용되는 변명은 아닐 것이다. 살이 안 빠지면 굶어라. 운동을 꾸준히 해라. 1년에 안 되면 3년을 목표로 하고 해라. 건강을 위해서라도 다이어트는 중요하다. 나를 봐라.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엄마를 잘 챙겨라

"네 엄마는 강하면서도 약한 사람이다. 내가 죽으면 네 엄마는 많이 슬퍼할 것이다. 엄마는 한 평생 남편과 가족만 알았던 사람이다. 젊은 시절 학원 사업에서 네 엄마가 두각을 나타냈던 것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열심히 했던 것이다. 아무리 사업에서 망하고, 내가 밉다고 하더라도, 네 엄마는 나뿐일 것이다. 내가 죽으면 힘들어 할 것이니,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도록 네가 잘 모셔야 한다."

포용력을 가져라
"사람은 나이를 먹을 수록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젊은 20대 때는 혈기 때문에 싸움도 많이 하고, 남을 미워하는 일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30대 이후에는 남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후배들도 하나씩 들어올 것이고, 결혼도 했으니 처가 식구들과의 관계도 중요할 것이다. 그동안 겪었던 일보다 더 많은, 상상도 못할 일이 많을 일도 겪을 수 있으니 항상 포용력 있게 마음씨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영어 공부를 해라

"지금 너의 수준은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한 단계 더 수준 높은 업무를 보기 위해서, 너 자신이 더 큰 물에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영어 수준을 높여야 한다. 네가 영어로 의사소통은 할 수 있겠지만, 외국 전문가들과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을 하기에는 한참 모자랄 것이다. 다행히 영어로 읽거나 쓰는 것은 고교 시절 내가 영작을 2년 동안 확인을 한 것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는다. 아직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미래에 네가 잘 될 수도 있다. 세계의 기라성같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려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기라도 하면 무슨 창피한 일이냐. 그래서 부족한 시간을 쪼개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

네 아내한테 잘 해줘라

"네 아내가 아프면 다 네 고생으로 돌아온다. 간단히 생각해도, 아파서 입원이라도 하면 수발을 누가 들겠느냐. 또한 네 자신을 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도, 친척도 아닌 네 아내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항상 져 줘야 하고, 잘 해줘야 한다. 내가 보니 며느리는 몸이 약한 것 같다. 그걸 잘 챙겨주는 것도 남편의 몫이 될 것이다."

오늘도 아버지는 "아들아 운동은 했니" "이제 여름인데, 잘 준비를 해라" 같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1년 전만 해도 "결혼은 언제 하니"가 제1번이었지만 지금은 없다.

* ps. 가끔은 아버지와 전화 통화나 대화를 해보면, 자와할랄 네루가 썼다는 ‘세계사 편력(Glimpses of World History)’ 생각이 나기도 한다. 아버지는 편지로 내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당부를 남길 기력은 없지만, 매일 전화로 훈계를 한다. 불효일기는 나의 걑세계사 편력걒인걸까. 아쉽게도 아버지는 역사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신다. 스스로 잘 챙겨보라는 뜻인가.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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