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285)제58화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 비사|50년대"문예"지 전후-조광현(4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예술인의 교류>
8·15 해방으로부터 6·25 전후에 이르는 한동안 이 나라의 예술인들이 얼마만큼 순수한 교류와 우의를 서로 돈독히 했는가 하는데 대해서 한마디쯤은 이야기해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문단이 가족적인 소규모였던 것처럼 악단이나 미술계도 몇 사람 안되는 상태여서 예술인 상호간의 접촉과 교류는 지금과는 전혀 그 성질이 달랐다.
지금은「예총」을 중심으로 10개 단체가 연합되어 있어 개인적인 교류보다는 단체적인 연 관이 있는 것뿐인데 그 무렵에도「문총」이라는 단체가 있었지만, 그러한 단체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접촉과 교류가 아주 순수한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어져 있었다.
해방직후 문인들이 많이 모이는 다방이나 술집에 미술가나 음악가도 자주 얼굴을 나타냈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지만, 6·25 전후까지 그러한 분위기는 하나의 예술적 풍토로서 존속되어왔었다.
해방직후 자주 접촉했던 예술인들은 문단의 박종화 김광섭 이헌구 김동리 조지훈, 화단에서는 고의동 김환기 남 관 도상봉 배 염 성풍곡 손재성(서예) 배길기(서예) 구본웅 백영수 박고석, 음악가로서는 현제명 김성태 임원식 김생려 윤룡하 윤이상, 연극인으로서는 유치진 이광내 이해랑 이진순 김동원, 국악계 인사로서는 성경린, 영화인으로서는 안석영 이규환제 씨 등이었다.
분야가 다르고 연령의 차이가 많았는데도 노소가 서로 허물없이 동고동락 할 수 있었던 것은 좌경적인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풍조에 대한 공동의 반발의식과 공동의 예술적 관심의 소치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중에서 나는 가장 연소한 청년으로서 버릇없이 이분들의 분위기 속에 끼여들었던 것이 아닌가싶다. 특히 이제는 고인이 된 김환기 배 렴 두 화백과는 지금「파리」에 가 있는 남 관 화백과 함께 나는 각별한 친교를 가졌었다.
이러한 예술인들의 허물없는 교류가「문총」도 만들어 내고 예술원도 만들어 내게 되었지만, 최근의 예술원 선거 때의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최초의 예술원 회원은 예술계 각 분야의 등록된 예술가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다고 말했는데 자기와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를 쓸까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분야의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되었지만, 남의 분야에 대해서는 사정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이름조차 생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자연적인 교류가 이뤄지고 있었던 전기한 예술인들은 자연히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자기 분야의 사람들에게 권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부 예술분야 사람들은 타 분야의 예술인들에 대해서는 이름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어떤 분야에서는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학습을 시키듯 칠판에 각분야사람들의 이름을 써놓고 이것을 외우게 했다는「에피소드」도 있었다.
그만큼 서로 서로가 무슨 일에나 도우려고 했다.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그 조직적인 결함
보다도 개인적인 정??에 있었던 것이다. 미술전시회와 음악회, 그리고 출판기념회 같은 모임이 있으면 으레 서로들 참석했고 시인이 자기작품의 작곡을 원하면 밤을 새워가면서도 해주었고 누가 그림이나 글씨를 원하면 기꺼이 응해주었다.
지금 내가 소장하그 있는 그림이나 글씨 중에는 배렴 화백의 것을 위시하여 장우성·손재성·배길기·김환기·고희동·남관, 그 밖에 여러분들의 것이 많다.
그러한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그때의 순수한 인간적 교류에서가 아니었던가 싶다.
언젠가 선친이 가지고 계시던 고서화를 몇 점 팔려고 친면이 있는 화랑사람을 집에 불렀을 때 배렴 화백의 병풍과 김환기·남관 씨의 그림을 그는 각각 고가로 팔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물론 나는 팔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거절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들에게서 친근하게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귀한 물건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의 그 인정과 그 분위기가 아쉽다고 말한다면 화단의 여러분들께서는 공짜를 좋아하지 말라고 물론 나무랄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의 이색적인 작품의 하나는 손재성 선생의 포도그림이다. 서예의 대가인 손재성 선생의 그림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것이 아닌가 싶다. 6·25 직후에 있은 대한 미술 협회전에 출품했던 것인데 그림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어느 외국사람이 원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내가 가지고 말았다.
얼마 안 가서 내 거짓말은 탄로가나고 말았지만, 손 선생은 별로 나무라지 않았다. 재산은 없지만, 현초(이??태)·장우성·풍곡(성재휴)·금기창·서세옥·천경자·박노수·김환기·남관·장욱진 제화백들의 작품과 함께 손재성·배길기, 그밖에 몇분의 작품 30∼40점이 있어 그렇게 허전하지가 않다.
큰딸 애가 시집갈 때 아무 것도 해줄 것이 없어 배길기씨의 병풍 하나로 때웠는데 둘째 딸애가 시집가면 몇 점의 서화로써 혼수감을 또 대신할 수밖에 없겠다.
음악인 중에서는 현제명 선생의 사랑을 나는 가장 많이 받았다. 그분의 서거는 아버지를 잃은 것 같은 허탈감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