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5) 해태로 최종 낙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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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굳게 믿었던 금호가 호남연고팀 창단을 백지화함에 따라 나는 다시 대한교육보험과 접촉했다. 당시 전남야구협회 회장이자 광주일보 사장이었던 김종태씨(현 광주일보 대표이사 회장)가 교보를 추천했다.

김회장과 나의 인연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2년은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한 해였다. 그때부터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들의 우승과정은 '자, 지금부터야'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해 군산상고가 고교야구 정상에 오르고 난 뒤 군산 경성고무 사무실로 김회장이 찾아왔다.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김회장은 나에게 "이 사장님께서 군산야구를 중흥시킨 것처럼 저는 전남의 학생야구를 육성해보겠습니다"라며 조언을 구했다.

나는 군산상고의 우승이 초.중학교의 야구저변을 넓힌 데에서 비롯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야구 육성.발전을 주제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때부터 김회장과는 절친한 사이가 됐다.

김회장의 추천으로 대한교육보험과 접촉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교보의 이사회에까지 야구단 창단 안건이 상정됐지만 이사회는 "보험회사가 프로야구팀까지 만들어가며 회사를 광고할 필요는 없다"라며 창단 건의안을 부결시켰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또 한번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막막한 상황에서 김종태 회장이 다시 나섰다. 김회장은 경복고 동창인 '빨간 장갑의 마술사'고(故)김동엽씨(당시 한양대 야구감독)와 힘을 합쳐 경복고 후배인 해태제과의 박건배 사장을 내게 소개해줬다.

호남 연고기업인 해태는 제과업이 주업종인 만큼 광고와 홍보가 적극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도 박건배 사장에게 프로야구팀이 갖는 홍보매체로서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이에 마음이 움직인 박건배 사장은 김동엽씨를 감독으로 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야구단 창단을 수락했다.

해태의 참여가 결정되면서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롯데에서 불만을 표시했다. 앞서 3회 때 잠깐 언급했지만 "경쟁 업종의 기업은 가급적 배제한다"라는 원칙에 위배됐기 때문이었다.

롯데는 "호남지역의 롯데제품 시장점유율은 그렇지 않아도 해태에 비해 열세인데 프로야구에서까지 라이벌이 되면 열세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프로야구단 운영으로 얻는 광고효과로는 상쇄할 수 없을 만큼 판매에 큰 차질이 빚어진다"고 주장했다. 롯데는 "해태의 참여가 불가피하다면 우리 연고지를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하루가 다급한 시점에서 롯데의 불만 때문에 해태의 참여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거나, 이미 정해놓은 연고지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롯데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룹 전체의 사세에는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이에 롯데는 큰 파문 없이 연고지 변경 요구를 철회했다.

호남 연고팀이 해태로 결정되기까지에는 이렇듯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나 인천 연고팀이 삼미로 결정되고, 대전 연고팀이 두산(OB)으로 결정되는 과정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창립계획서를 만들 때 인천과 대전의 제1후보였던 기업은 현대와 동아건설이었으니 말이다.

이용일(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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