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고의 예술적 감동|「필라델피아·오키스트러」내한공연을 듣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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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백병동(서울대교수)】「필라델피아·오키스트러」의 내한연주는 일련의 세종문화회관 개관 예술제「시리즈」중에서 가장 기다렸던 연주회였다. 이러한 명문이 제발로 우리 나라를 찾아준다는 것이 어쩐지 믿어지지 않을 듯한 일이었지만 분명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현대의「오키스트러」를 대별한다면 개성과 보수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대체로 지휘자의 성격차이에서도 나올 수 있고「오키스트러」의 체질과도 관련이 될 것이다.
「로린·마젤」이 이끄는「클리블랜드」나 「기요르크·숄티」가 이끄는「시카고」교향악단 등은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되겠고 후자에 속하기로는 주저 없이「필라델피아」를 들게된다.
80을 눈앞에 둔「오먼디」는「오키스트러」를 거느리는「마에스트로」중 가장 고령인데다가 세계의 유수한「오키스트러」들이 생기발랄한 젊은 지휘자를「포스트」에 앉힘으로써 체질개선을 감행하고 있는. 추세로 볼 때 유독「필라델피아」만이 아직껏「오먼디」를 신주 모시듯 받들고 낭만적 표현방법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오히려 이들이 정상을 고수하는 요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오먼디」의 극도로 절제된「제스처」에서 나오는 음향은 절약된 동작과는 정반대의 그야말로 풍요한 음향의 향연이었다.
처음 애국가가 시작되는 첫 음에 벌써「필라델피아」의「오르간」적인 음향에 압도되고 만다. 이처럼 무게 있고 장중한 애국가에 접해본 기억은 아직 없었다.
뚜렷한 개성보다는 만능형의 소화력을 지니는 이 악단의 화려한 음색은 별명 그대로「오먼디·사운드」인 것이다.
이틀에 걸친 연주를 들으면서 도대체「오먼디·사운드」의 비결이 어디에 있나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로는 현군이 중심이 된 각「섹션」의 유기적인 배합을 들 수 있다.
금관이나 타악기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항상 현의 찐득찐득한 관능적인 색감에 침투되기 때문에 진하게 채색된 듯한 풍만하고 화려한 음향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뒷자리를 올리지 않고 평면에 그대로 관과 타를 배치한 것도 이러한 의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한가지는 저음이 바탕을 이루는「피라밋」과 같은 음량 구축법 이다.「다이내믹」의 폭을 심하게 두지 않고 저음을 항상 밑에 깔아 둠으로써「오르간」적인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바하」의「파사칼리아」의 시작부분, 그리고 「브람스」의 제1번의 4악장과『돈·환』에서 주제가 재현될 때 추가되는「첼로」를 강조한 점은 특히 압권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분위기묘사에 어쩔 수 없이 약점이 노정된다. 「드뷔시」의『바다』에서 1악장이 그랬고, 『돈·환』에서도 중간부, 「오보에」가 요염하게 독주할 때 배경에서 움직이는 섬세한 음향은 너무나 윤곽이 뚜렷했다.
이들의 체질에 맞고 또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시벨리우스」의 제1번과『「로마」의 소나무』였다. 압도적인 박력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마력은 이들의 자발적인 표현욕구에서 표출되는 일체감의 조화로서 지휘자와 단원의 상호신뢰에서 이루어놓은 지고의 예술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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