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탐사 소동」기대가 성급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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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기대에 부풀었던 충무 앞 바다 침몰 거북선 탐사작업은 완전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제1단계「사이드·스캔·소나」조사에 이어 지난 22∼27일까지 실시된 해군 심해 잠수사를 동원한 제2단계 잠수탐사결과 거북선일 가능성이 있다던 4개의 침몰선체는 모두 어민들이 어초 용으로 버린 폐 어선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확인된 침몰선의 위치가 바로 지난해 우렁쉥이 양식용으로 2척의 폐선을 집어넣은 곳과 같은 지점이라는 현지 마을 어민들의 이야기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문공부와 해군 해난구조대, 미국「내셔널·지오그래픽」지의 수중탐사「팀」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경남 통영군 산양면 미산리 달아 마을 앞 바다에서 침몰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잠수탐사작업 도중 마을 어민들로부터 이같은 이야기를 듣고 크게 실망했었다.
원래 거북선에 대한 연구와 탐색작업은 지난 69년부터 해군에서 꾸준히 계속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 등에서 맹위를 떨쳤던 거북선의 실체를 완전히 고증하지 못한 상태다.
대체적으로 현재까지 밝혀진 거북선의 정체는 1백30여명 정도의 병사들이 승선한 중형의 목선이었다는 것. 그리고 선수에는 나무로 조각한 용두가 있고 배 위는 거북등 모양의 얇은 철제 혹은 기타 금속장식을 한「구배」라는 덮개만이 있었다.
주위에는 12문의 포혈이 있고 구배에도 총혈과 덧문 창이 있었다. 선체 무게 1백t, 배 길이68척, 폭 14.5척, 높이 20∼21척, 속도 6「노트」정도였던 것으로 고증돼 있다.
배 위에는 돛대와 꿩 깃대, 활대, 구자기 등이 앞에서부터 나란히 세워져 있었고 닻은 선수의 괴두 옆에 달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거북선에 사용된 나무의 두께는 4촌 정도였으며 배 양옆의 육판위 16개의 노 구멍을 통해 노를 저었다.
1590년대에 만들어 임진왜란 중에 크게 활약한 병선인 거북선은 그후 갑오경장(1894년)때 까지도 비록 선체에 많은 변형은 있었지만 계속 건조돼 왔다.
그러나 이 같은 학계의 고증에도 불구하고「거북선」이라는 이름조차가 언제부터 비롯됐고 누가 붙인 것인지 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거북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설계도를 발견하지 못함으로써 정확한 실체 파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그래서 거북선을 찾는다 해도 그것이 꼭 임란 때 사용됐던 것인지를 구명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재로서는 침몰된 거북선이 남아있으리라는 기대 조차가 극히 비관적이다.
그 이유로는 선체가 모두 부식 돼 없어졌거나, 개펄에 완전히 묻혀야 보존 될 수 있는데 그렇게 깊이 묻혔다면 발견이 불가능하다는 것.
어쨌든 거북선의 탐색작업은 수수께끼 속에서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번 거북선 탐사작업은 해군○○함을 모선으로 하고 대형 부선과 예인선, 작업선 등을 동원한 대규모적이었던 게 특징. 그러나 기록상 임진왜란 때의 해전이 없었던 해상이었음 등을 감안할 때 단순한「사이드·스캔·소나」에 너무 성급한 기대만을 앞세웠던 경솔한 탐사였던 것 같다.
작업을 실제 총 지휘한 해사 조성도 교수도『작업조건이 용이한 지상발굴도 몇 년씩 걸리는데 하물며 몇십 시간의 탐사로 해저발굴을 성공시킨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탐사는 앞으로의 해저발굴이나 탐사작업에 좀더 신중함과 특히 외국인의 조사 등에 쉽게 흥분하는 성급한 기대는 절대 금물이라는 새로운 교훈을 남겼다. 【이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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