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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정비석>(2213)|제58화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 밀사-40년대 「문장」지 주변 (42)|맥고모자 유죄|정비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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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동인 (금동)이 학예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어느날 새 사주인 방응모 사장이 편집국 순시를 왔었다. 새로 취임한 사장이 편집국에 나타났으니 국장 이하 전 사원이 모두 일어서서 사주를 영접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학예부장인 김동인만은 일어나 사장을 영접하기는커녕 자기 자리에 눌러앉아 원고만 쓰고 있었다. 그나 그뿐이랴. 그때가 마침 한여름이어서 「맥고모자」를 쓰던 시절이었는데, 김동인은 머리에 쓰고 있던 「맥고모자」 조차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와도 모자를 벗지 않는 것은 김동인의 한평생의 습성이었다.
그러나 김동인이라는 인물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새 사주 방응모에게는 그처럼 「오만불순한 태도」가 비위에 거슬렸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본인은 아무 생각 없이 평소와 같이 자기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건만 사주 방응모로 보면 일대 모욕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장이 나타나도 모자도 벗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은 것은 자기 나름대로 주관이 뚜렷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장은 사장이요, 나는 나다. 나는 학예부장으로서의 직책만 다했으면 그만이지 대작가인 내가 비굴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첨을 떨 것은 없지 않느냐』하는 것이 김동인의 생각이었던지 모른다.
김동인은 특히 그럴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 말기에 박영희 임학수와 함께 만주 방면으로 소위 「황군위문」을 다녀와서도 『기억력이 박약해졌다』는 핑계로 「위문 기행문」을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인 김동환이 경영하던 「삼천리」지에 일본 천황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임전 보국단」에 대한 글을 썼다가 「천황 불경죄」로 옥고를 치를 지경이었으니, 신문사의 사장쯤 별로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장 방응모는 김동인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매우 불쾌하여, 사장실로 돌아오자 곧 편집국장을 불러 학예부장을 당장 쫓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주요한은 김동인이라는 인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인간』이라는 것을 역설하면서, 김동인을 쫓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평양에서 같이 자라고, 동경에서 「창조」를 같이해온 개인적인 친분으로 보아도 주요한은 아무리 사장의 명령이라도 김동인을 차마 쫓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문제는 그 정도로 일단 무마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방응모는 김동인 같은 불손분자가 사원으로 있어 가지고서는 사장의 체통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든지, 그로부터 며칠 후에 편집국장인 주요한이 지방 출장을 나간 사이에 편집국 차장인 김형원을 불러 학예부장 김동인을 당장 면직시키라는 엄명을 내렸다.
불의에 면직을 당한 김동인은 크게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책상을 뒤집어엎고 신문사를 그만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김동인을 면직시킬 때 신문사에서는 그가 쓰던 『운현궁의 봄』도 끊어버리려고 하였고, 김동인 자신도 그런 각오로 연재를 중단해 버렸다.
그랬더니 그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얼마나 깊었던지 소설이 중단되자 독자들로부터 『소설을 계속하라』는 투서가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그래서 신문사로서는 판매 정책상 『운현궁의 봄』을 중단할 수가 없게 되었고, 김동인도 면직과 작품 활동은 별개 문제라는 생각에서 독자들의 요구에 응하여 소실만은 그대로 계속했던 것이다.
김동인은 그처럼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힐 줄 모르는 오만한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도록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자도 최고급으로 썼고, 평소에도 개화장을 짚고 다니기를 즐겨하였다.
성격이 무척 과묵한 편이어서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썩 웃기만 할뿐이었지, 남들처럼 자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거의 없었다.
정신 자세가 무척 고고해서 일반 사람들과는 쉽게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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