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적성 비 완성복원 가능성|단국대 학술회의 관계학자 18명의 의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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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1월초 단양 적성산성에서 발견된 진흥왕비의 성격과 연대를 마무리짓는 좌담회가 지난25일 하오3시 단국대 교수 회의실에서 이병도 학술원 회장을 비롯한 관계학자 18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4시간에 걸쳐 토의된 이 모임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진지하게 교환했으나 비의 명칭을 다음 발굴 때까지「단양 신라 적성 비」로 유보하는 한편 551년(진흥왕 12년)전후 세운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으로서 척 경비의 선구적 형태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 좌담회는 차문섭 교수 사회로 정영호 김원룡 김철준 김석하 남풍현 이기백 임창순 변태섭 황수영 교수가 논문을 발표하고 이희승 이병도 권오순 진홍섭 최순우 최영희 김정기 김동욱 제씨가 토론에 참가했다.
단양에서 발견된 진흥왕비에 대한 공통된 관심의 쟁점은 그 글 뜻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데 있다.
비문 내용은 대체로『진흥왕이 이사 부 등 10명의 고관에게 하교하여 신라 척 경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 야흠차의 공훈을 우선 표창하며 장차야이차처럼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겐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요지의 국가정책 포고다.
서울대 변태섭 교수는『새로 개척한 영토의 유공자에게 포상을 내리고 앞으로 충성하는 자에 대해서도 포상을 약속하는 것은 진흥왕 순수비의 선구적 형태로서 척 경비의 성격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또 서강대 이기백 교수는 기존의 다른 순수비들이 추징 적인 미 구로 시종 했음에 반하여 단척비는 민심을 무육하는 구체적 시혜 내용을 담고 있어 막연한 민심채방 보다 더 소중한 사료가 된다고 보았다. 이 교수는 전문을『왕 교사』『절 교사』『별 교』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그중 왕자사의 인명을 복원, 거기 나오는 사람들과 그 표기형식으로 보아 진홍왕 후기의 순수비와는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서울대 김원룡 교수는 적성이 첫 전초기지이기 때문에 자 시적 척 경비이기보다는 현지 주민을 포섭키 위한 안거비적 성격이 더 짙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적성산성에서 주운 토기가 경상도의 전형적인 신라 토기와는 달리 백제 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초의 발견자인 단국대 정영호 교수는 적성이 애당초 고구려 땅으로서 온달유적의 일환이라 보았고, 깨진 비석의 소 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발굴하면 비석자체가 복원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비석에 나타난 핵심 인물은 적성출신의 야이차와 파진루 2명으로 축소됐으나 자구 해석상 야이차가 인명이 아닐지, 모른다는 이의도 제기됐다.
이같이 인명에선 혼선이 적지 않고 또「적성전사 법」이 고구려 때부터 쓰이던 당시 전래제도가 아닐까(임창정)하는 견해 등 여러 가지 의견의 제시로 끝난 느낌이 없지 않다. 다만 소자·소녀 등에게까지 별관을 내려 주는 등 후하게 포상했다고 밝혀졌다.
적성에서 왕명을 받들어 일한 10명의 고관 가운데 처음 나타나는 직명인「대중 등」은 군 조직의 참모 기구가 아닐까 하는 것이 단국대 남풍현 교수의 의견. 이 대중 등에 6명이며 그밖에 지방관직으로 군주 등(주의 장관)이 2명, 당 주(군의 장관)가 2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기백 교수는 인명을 분석해·이사부지·내예부지·비차부지·조흑부지 등 탁부 사람들은 4자로 돼 있고 끝 글자에「부지」가 붙어 있고 그중 서부질지는 서질부지의 오각일 것으로 보았다. 이에 비해 사탁부 출신은 두미지·무력지·도설지 등 3자로 구성돼 있는데 이러한 것은 국가적 조치에 의해 획일성이 유지되던 시대의 묘기 법 이어서 신라의 아주 오랜 여러 가지 제도를 새로 짐작케 한다고 말했다.
단국대는 3월 말 이곳을 발굴할 계획이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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