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언론인 아넷과 미국인 아넷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미국인 피터 아넷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는 미국 시민으로서 이라크 국영 TV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적국(敵國)'의 시청자들 앞에서 그는 조국 군대의 오판을 비난하고, 미군의 초기 작전 실패를 주장했다.

그의 말이 많은 이라크 국민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을 수 있다고 본다면 그의 행위는 이적(利敵)행위에 다름 아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수백명의 이라크 방송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데 대한 직업상의 답례 차원에서 즉석 인터뷰에 응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적어도 그는 경솔했다. 책임의 소재와 명분의 유무를 떠나 어떻든 지금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 중이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바그다드에 남아 공습 상황을 생생하게 리포트함으로써 아넷은 일약 세계적인 스타 기자가 됐다. 다시 한번 그 때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그의 꿈은 순간의 부주의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를 고용한 미국의 NBC는 바로 다음날 그를 해고했다.

걸프전 기간 중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그저 CNN을 지켜보며 전황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폭탄이 쏟아지는 바그다드를 배경으로 마이크를 잡은 아넷은 우상이었다. 적국 수도의 한복판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채 기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그 직업근성에 나는 경의를 표했다.

그 용기와 정열이 단지 CNN이라는 매체의 상업적 이해와 이라크 정부의 정략적 이해의 결탁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베트남전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아넷은 걸프전 보도로 종군기자의 전설이 됐다.

그는 실수를 인정했다. NBC에서 해고되자마자 영국 일간지 데일리 미러는 그를 바그다드 특파원으로 채용했고, 다음날 그는 그 신문에 글을 썼다.

"미국의 우파 언론들은 바그다드에 있는 기자들을 비판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고 말한 그는 "나는 그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자인했다.

그는 "이런 언론현상에 두려움을 느낀다"면서 "비판자들은 내가 적에게 위안과 지원을 줬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나는 단지 진실을 말할 수 있기를 원할 뿐"이라고 적었다.

기자는 사실을 통해 진실을 지향한다. 미국의 발표도, 이라크의 발표도 기자에게는 그대로 사실일 수 없다.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냉정한 머리로 따져 옳다고 믿기 전까지는 그저 양측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그렇기에 기자들은 남들은 피하지 못해 안달하는 전쟁터를 못들어가서 안달을 한다. 미군의 발표대로라면 미군의 초기 작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도통제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수백명의 종군기자들이 있기에 그나마 우리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기자들에게 애국심의 잣대를 들이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미국 언론의 애국주의 보도 경향이 논란이 되고 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다시 불고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들린다.

애국적 보도의 선봉에 선 폭스TV의 앵커인 닐 카부토는 "당신이 계속 한쪽에 치우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보도행태를 보인다면 언론인으로 자처할 자격이 없다"는 한 언론학 교수의 지적에 "난 언론인이기에 앞서 미국인"이라고 반박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인이면서 언론인이다. 한 쪽 말에만 귀를 열고 다른 쪽 말에는 귀를 막는다면 그는 방송기술자일지는 몰라도 언론인은 아니다. 전시상황이라고 다를 건 없다.

언론인 피터 아넷을 나는 옹호한다.

배명복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