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나온 앵그리 맘 “나라가 못 지켜주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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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06면

“엄마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 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불순한 선전·선동에 앞장서는 엄마가 되겠습니다.”

청계광장서 열린 세월호 추모 집회 현장

17일 오후 6시30분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 단상 위에서 노란 손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여성이 울며 소리쳤다. 광장 가장자리에 앉은 40대 여성과 그 옆에 있던 단발머리 중학생 딸이 따라 울었다. 모자를 눌러쓴 옆자리 아빠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세월호 참사 추모 5·17 범국민 촛불행동’ 집회에는 수만명(주최측 5만명, 경찰 1만5000명 추산 주장)이 몰렸다. 세월호 침몰사건 이후 최대 규모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 진보단체의 깃발이 단상 앞에서 휘날렸다.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나온 엄마들,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나온 아빠들이 조합원들 사이에 섞여 앉았다. 단상에 선 한 여성은 “엄마들의 집회가 반정부 집회·노동자 집회·정치적인 집회라고들 말하지만 아이들 수백 명이 죽은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우리들의 이름은 그냥 엄마다”고 외쳤다.

집회는 진보단체 회원들이 진행했지만 집회 중심엔 ‘앵그리 맘(Angry mom·화난 엄마)’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이 있었다. 아이 낳고 집회에 처음 나와 봤다는 조모(32)씨는 “집에 앉아 있는 것이 죄스러워 유모차를 끌고 왔다”고 했다. “엄마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주장이 있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정치를 정치인만 하라는 법이 있느냐, 나라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에서 온 남수정(45·여)씨도 초등학생 아들딸과 함께 돌바닥에 앉았다. 도시락을 들고 온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 모두 정부의 초동 대처와 이후에 보여 준 무능력함에 분노해 나온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앞서 오후 4시20분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엄마들이 서울 도심에서 도보행진을 벌였다. 인터넷카페 ‘엄마의 노란 손수건’ 회원 40여 명은 노란 천에 ‘엄마들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을게’ ‘국가란 무엇인가’ 같은 글귀를 써 등에 둘렀다. ‘효빈맘’ ‘서연맘’ ‘산본 언니’ 등 자신의 닉네임도 함께 새겼다. 광화문과 을지로 일대를 한 시간 넘게 걸으며 “엄마가 꼭 밝혀 줄게” “나는 엄마다”고 외쳤다. 간간이 애국가도 불렀다. 광장에 있던 70대 할아버지가 “사회불안 일으키지 마라”며 꾸짖었지만 대꾸 없이 지나쳤다.

도보 행진에 참가한 박인정(55·여)씨는 “한 어머니가 ‘어버이연합회’ 회원들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해 그제야 그런 단체가 있다는 것도 알았을 정도다. 시민단체 활동은 해 본 적도 없다”며 “그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한 우리 엄마들이 길에 나왔다”고 말했다. 카페에서 ‘정인맘’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 중인 40대 여성도 “기득권층은 유가족에게 상처만 줘 놓고 엄마들은 정치하면 안 된다고만 한다”며 “나는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나도 정치라는 걸 하러 나왔다, 그들만 정치하란 법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들도 동참했다. 길을 지나던 40대 남성은 “엄마들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노란 손수건 행진을 뒤따르던 오장호(52)씨는 “어머니들만 나오게 둘 수는 없지 않으냐. 아파트 주민 몇몇이 함께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운 적이 없는데, 세월호 사건을 보고 자식을 둔 아빠로서 마음이 너무 아파 펑펑 울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부분 사전에 신고된 행진로를 벗어나지 않았으나 청년과 노동단체 회원 수십 명이 “청와대로 가자”며 종로 3가 교차로에서 계동 쪽으로 진출해 이를 막아선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일부 참가자들은 경찰에 연행됐다.

이날 청계광장 건너편 서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보수단체의 집회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이용해 갈등을 조장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규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국고엽제전우회·전국재향경우회 등 보수단체 회원 2500여 명은 “세월호 참사 악용세력들의 악다구니 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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